민백 구산선문 관련 기사 검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종구산문
예시 1
선종구산문
염거는 설악산의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법을 체증에게 전하였다.
체증은 837년(희강왕 2) 중국에 들어갔다가 840년(문성왕 2)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그는 무주의 황학사(黃壑寺)에 머물다가, 859년(헌안왕 3)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寶林寺)에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김언경 등의 후원을 받으면서 사원세력이 커지고, 가지산사로 사액을 받아 가지산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으로는 성(性)과 상(相)이 다르지 않음과 마음이 족하면 뜻이 일어남[心足意興] 등이 설해졌다.
그의 제자에 형미(逈微)·영혜 등이 보이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는 형미이다. 형미는 891년에 중국에 들어가 운거(雲居, 道膺)의 법을 받아 905년(효공왕 9)에 귀국하였다. 그는 왕건의 귀의를 받아 같이 왕경으로 왔다가 궁예에게 피살되었다.
가지산파
염거는 설악산의 억성사(億聖寺)에 오래 머물렀으며, 체징(體澄)에게 법을 전하였다. 체징은 837년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선사들을 만나 보았으나, 도의가 물려준 법밖에 따로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840년에 귀국하여 보림사를 세우고, 형철(逈徹) 등 800여명의 제자를 배출하여 가지산의 한 선파를 이루었다.
예시 2
선종구산문
대통은 856년에 중국에 들어가 앙산(仰山, 澄虛)의 법을 받고 866년(경문왕 1)에 귀국하여, 충주 월광사(月光寺)에 거주하였다. 월광사는 무열왕계 후손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도증(道證)이 창건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성주산문과 연결된 절이다.
성주산파
무염의 뛰어난 제자인 대통은 845년(문성왕 7) 중국으로 건너가 앙산(仰山)의 법을 얻고, 866년(경문왕 6) 귀국하여 제천월광사(月光寺)에서 선법을 폈으며, 여엄 또한 양평보리사(菩提寺)에 머물면서 선법을 선양하였다.
→ 845년에 출가하고, 856년에 당에서 귀국하였음.
예시 3
선종구산문
범일은 831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鹽官, 齊安)의 법을 받아, 846년(문성왕 8)에 귀국하였다.
사굴산파
개조(開祖)인 범일은 831년(흥덕왕 6) 당나라로 건너가서 제안(齊安)의 선법을 이어받아 847년(문성왕 9) 귀국하였으며, 곧바로 굴산사를 창건하여 40여 년을 살면서 선법을 전파하였다.
→ 847년에 귀국한 것이 맞음.
예시 4
선종구산문
희양산문의 개창자는 지증이다.
희양산파
935년(태조 18) 정진국사(靜眞國師) 긍양(兢讓)이 선풍을 선양하여 세웠으며 희양산선문 또는 희양산선파라고도 한다. 긍양이 희양산에 들어가 봉암사를 일으켜 문풍(門風)을 선양함으로써 희양산파가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그가 희양산의 개산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종래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선문조사예참의문 禪門祖師禮懺儀文≫ 등에 의하면 ‘희양산조사 산신현청도헌국사(曦陽山祖師山神現請道憲國師)’라고 하였으므로 모든 학자들이 그대로 답습하여 도헌, 즉 지증국사(智證國師)를 희양산의 조사 및 개산조로 보아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기록한 지증대사비에 의하면 그가 긍양보다도 먼저 봉암사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희양산파의 조사로 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