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흉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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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배
(胷褙)
쌍학 흉배, 국립고궁박물관(http://www.gogung.go.kr/) 소장.
대표명칭 흉배
한자표기 胷褙
구분 기타
착용신분 백관
착용성별 남성



정의

백관의 상복단령의 가슴과 등에 달아 착용자의 계급을 표시하는 사각형 장식이다.[1]

내용

흉배에는 계급을 표시하는 주요 도안을 중심으로 장생문과 보문 등을 배치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직사각형의 흉배 문양을 직조한 옷감으로 단령을 만들어 입었으나, 점차 직조된 흉배 문양의 조각을 잘라서 흑단령에 붙이다가 임진왜란 후에는 대부분 자수 흉배를 달게 되었다. 1454년(단종 2)에 명나라의 제도를 본떠 문관 1품은 '공작(孔雀)', 2품은 '운학(雲鶴)', 3품은 '백한(白鹇)', 무관 1·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비(雄飛)', 도통사는 '사자', 대사헌은 '해치(獬豸)', 왕자와 군은 '백택(白澤)'을 달도록 하고, 당하관 이하는 흉배를 달지 않았다. 기록에는 없으나 17세기 흉배 유물을 보면 문관의 경우 '운학'와 '공작', '백한', '노사(해오라기)' 흉배 등이 사용되었고, 무관의 경우는 '사자', '해치', '호' 흉배를 사용했다. 숙종대에는 6품 이상에게 흉배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영조대에는 9품까지 흉배를 사용하게 하였다. 『속대전』에 문관 당상관은 '운학', 당하관은 '백한'흉배를 사용했고, 무관은 '사자'와 '호' 흉배를 사용했다. 정조대에는 문관 당상관은 학 두 마리가 한 쌍을 이루고 있는 '쌍학(雙鶴)', 당하관은 학 한 마리인 '단학(單鶴)' 흉배 사용하는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정조말에서 순조 초인 19세기 초에는 무관 당상관이 두 마리가 쌍을 이루고 있는 '쌍호(雙虎)', 당하관은 호랑이 한 마리인 '단호(單虎)' 흉배를 사용하는 제도로 정착되었다. [2] 조선 초기에는 가슴을 다 가릴 정도로 크기가 큰 직사각 형태였으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작아진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백관 흉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백관의 상복 흉배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6쪽.
  2.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6쪽.
  3.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4.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5.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6.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7.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8.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9.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 김연미, 「조선시대 자수 흉배 연구-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송수진, 「한국과 중국의 흉배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 윤진영, 「신경유 정사공신상과 17세기 정반기 무신흉배도상」, 『韓國服飾』30호,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2008.
  • 이은주, 「조선시대 무관의 길짐승 흉배제도와 실제」, 『服飾』 58권 5호, 한국복식학회, 2008.
  • 하명은 이은주, 「날짐승 흉배의 감정을 위한 기준 설정」, 『한복문화』 10호, 한복문화학회,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