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표준영정
계백 표준영정 | |
한자명칭 | 階伯影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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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오태학 |
제작시기 | 1994년 |
소장처 | 삼충사 |
유형 | 표준영정 |
크기(세로×가로) | 120×161㎝ |
목차
정의
백제 말기의 장군 계백(階伯, ?-660년)의 표준영정.
내용
표준영정의 제작 및 보관
오태학(吳泰鶴, 1938년-)이 그렸고 1994년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부여 삼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계백은 1973년 10월 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조사 결과 선정된 표준영정 제작 대상으로 109위의 선현 중 하나이다. 그는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서 5만여 병력의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출천하여 황산벌(黃山 : 지금의 충청남도 連山)에서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즉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수로서의 이미지를 국민의 안보의식 및 국방의식 함양을 위해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109위의 선현 중 명장(名將)이 10명, 구국 및 순국선열이 31명, 기타 구국과 국방 관련 인물이 11인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
또한 계백 표준영정은 지방자치단체 주도로 지역 축제인 '부여 백제문화제'와 연계해서 제작되었다. 즉 계백 장군을 기리는 사당과 관련 축제가 함께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이다. [2]
표준영정에 묘사된 모습
붉은 술과 챙이 달린 투구를 쓰고 여러개의 철판들을 연결한 찰갑(미늘갑옷)을 입은 전신상으로 그려졌다. 챙 달린 투구는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라 여겨졌지만, 2007년 전남 고흥에서 5세기 전반 백제 유물로 챙 달린 투구가 나오면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3]
백제 갑옷을 완벽히 재현할 만한 연구자료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시대에 그려져, 복대나 신발 등 세부적인 부분에 작가의 상상력이 가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계백 표준영정 | 표준영정 | A의 유형은 B이다 | A dcterms:type B |
계백 표준영정 | 계백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계백 표준영정 | 부여 삼충사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계백 표준영정 | 오태학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94년 | 계백 표준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전남 고흥에서 발굴된 백제 챙 달린 투구[6]
주석
- ↑ 이영미,「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51-52쪽.
- ↑ 이영미,「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10쪽.
- ↑ 신형준, "1600년 된 백제 철갑옷·투구 공개",『조선일보』, 2007년 11월 23일.
- ↑ "계백",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 한국문화정보원. - ↑ "삼충사",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신형준, "1600년 된 백제 철갑옷·투구 공개",『조선일보』, 2007년 11월 23일.
참고문헌
- 웹 자원
- 신동하, "계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삼충사",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계백",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신형준, "1600년 된 백제 철갑옷·투구 공개",『조선일보』, 2007년 11월 23일.
- 신동하, "계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