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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 고승들이 일반적으로 신라 국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국사|국사(國師)]] 책봉을 받더라도 경주로 가지 않고 지방에 남아 있던 것과는 달리, 사무외대사는 다른 고승들에 비해 [[고려 태조|태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이들은 [[고려 태조|태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동시에 [[고려 태조|태조]]에게 고승의 권위를 인정받는 관계였다.<ref>송용운, 「고려 태조의 불교대책」,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25쪽.</ref> 이들은 모두 해안 세력 출신으로, [[고려 태조|태조]]와 유대감이 있었으며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인 이상을 펴기 위하여 [[고려 태조|태조]]를 선택했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93쪽.</ref>
 
신라 말 고승들이 일반적으로 신라 국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국사|국사(國師)]] 책봉을 받더라도 경주로 가지 않고 지방에 남아 있던 것과는 달리, 사무외대사는 다른 고승들에 비해 [[고려 태조|태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이들은 [[고려 태조|태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동시에 [[고려 태조|태조]]에게 고승의 권위를 인정받는 관계였다.<ref>송용운, 「고려 태조의 불교대책」,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25쪽.</ref> 이들은 모두 해안 세력 출신으로, [[고려 태조|태조]]와 유대감이 있었으며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인 이상을 펴기 위하여 [[고려 태조|태조]]를 선택했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9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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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19:06 기준 최신판

사무외대사
(四無畏大師)
대표명칭 사무외대사
한자표기 四無畏大師



정의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고승 네 명을 가리키는 말.[1]

내용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는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 스님"이라는 뜻으로, 선각대사 형미(先覺大師 逈微, 864-917),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862-930), 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870-936),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871-921)를 말한다.[2]

이전의 신라 선승(禪僧)들은 대체로 육조 혜능(慧能)의 양대 제자 중 남악 회양(南嶽 懷讓, 677-744)의 법맥을 이은 강서 도일(江西 道一, 709-788) 계통의 인가(印可)[3]를 받아왔다. 그러나 형미, 여엄, 이엄, 경유 등 선승 4인은 891년에서 896년 사이에 운거 도응(雲居 道膺, ?-902)의 문하에 들어가 인가를 받고 청원 행사(靑原 行思, 671-738) 계통의 법맥을 신라로 옮겨왔다.[4]

네 명 모두 중국의 운거 도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공통이 있었지만 중국에서의 활동으로 '사무외대사'라 불린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 들어와 태조와 결합하여 태조의 불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고려 정부가 '사무외대사'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5]

신라 말 고승들이 일반적으로 신라 국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국사(國師) 책봉을 받더라도 경주로 가지 않고 지방에 남아 있던 것과는 달리, 사무외대사는 다른 고승들에 비해 태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이들은 태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동시에 태조에게 고승의 권위를 인정받는 관계였다.[6] 이들은 모두 해안 세력 출신으로, 태조와 유대감이 있었으며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인 이상을 펴기 위하여 태조를 선택했다.[7]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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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사무외대사 형미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사무외대사 여엄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사무외대사 이엄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사무외대사 경유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도응 형미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도응 여엄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도응 이엄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도응 경유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사무외대사 고려 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형미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여엄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이엄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경유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주석

  1. 김준호, "사무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EBSCulture (EBS 교양),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_#001~#004" (방송일: 2002.11.08), YouTube, 작성일: 2013년 04월 18일.
  3. ① 인정함. 승인함. ②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인가",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최완수,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3 - 교종 미술의 완성과 선종미술의 개화』, 대원사, 2007. 온라인 참조: "사무외대사",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5. 송용운, 「고려 태조의 불교대책」,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23쪽.
  6. 송용운, 「고려 태조의 불교대책」,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25쪽.
  7.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93쪽.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