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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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이 [[민영환 자결터|순국 자결한 장소]]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 후술할 시종무관 어담(魚潭)의 회고에 따르면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 의해 [[조계사]] 경내의 본저(本邸)로 옮겨졌다고 한다.<br/>  
 
[[민영환]]이 [[민영환 자결터|순국 자결한 장소]]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 후술할 시종무관 어담(魚潭)의 회고에 따르면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 의해 [[조계사]] 경내의 본저(本邸)로 옮겨졌다고 한다.<br/>  
  오전 5시경에 급사로부터 작야(昨夜) 민씨가 자살하였다는 말을 듣고 놀라 민씨저(閔氏邸)로 뛰어갔다. '''민씨저가 의외로 조용하기로 집 사람에게 물은즉 괴정동(槐井洞)의 집사 집이라 하기로 또 그리로 뛰어가다가 중도에서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게 떠받들리어 본저(本邸)로 돌아오는 민씨의 유해를 실은 교자(轎子)를 만나게 되어 따라 들어갔다.''' 곧 교자에서 이불에 쌓인 유해를 모셔내어 침실로 옮겼다. 언뜻 얼굴을 보니 옆으로 두 치 정도의 구멍이 난 목줄기로부터 아직까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원망하는 듯 노한 듯 딱 부릅뜨고 있는 양쪽 눈은 처절하고도 가여웠다. 다음 오른손에 꽉 쥐고 있는 작은 칼을 풀어내고 의복을 벗기니 일(一)자로 할복하고 있었다. 칼을 만져보니 손톱 깎기에 쓰는 퍽 작은 칼로서 깊이 찌를 수 없었기에 다시 상처 위로 좌로 우로 몇 번이나 칼질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의복의 양 무릎에 좌우 손을 닦은 듯한 핏자욱이 묻어 있는데, 생피가 찐덕찐덕하여 작은 칼을 쓰기 어렵게 되자 좌우 손으로 칼을 바꿔 쥐어가며 한 손의 피를 무릎에 닦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같이 하고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목구멍을 옆으로 끊어 젖힌 것이 아닌가! 참으로 장절한 죽음이었다.<ref>조정래, <아리랑 1: 조정래 대하소설>, 해냄, 2001, 325쪽;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29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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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씨저가 의외로 조용하기로 집 사람에게 물은즉 괴정동(槐井洞)의 집사 집이라 하기로 또 그리로 뛰어가다가 중도에서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게 떠받들리어 본저(本邸)로 돌아오는 민씨의 유해를 실은 교자(轎子)를 만나게 되어 따라 들어갔다.'''<ref>조정래, <아리랑 1: 조정래 대하소설>, 해냄, 2001, 325쪽;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291쪽.</ref>
 
그런데 위 민족기록화에 묘사된 배경은 문 밖에 합장하고 있는 승려, 마당의 석등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경내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으므로 고증 상의 오류로 보인다. 경향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 있다.<br/>  
 
그런데 위 민족기록화에 묘사된 배경은 문 밖에 합장하고 있는 승려, 마당의 석등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경내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으므로 고증 상의 오류로 보인다. 경향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 있다.<br/>  
  그러나 당시 자결장소인 이완식의 집에 글공부하러 드나들던 김우현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閔忠正公(민충정공)은 한복차림에 이른새벽에 자결했고 '''아침 일찌기 시신을 본가로 옮겨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 외엔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것.''' 또 유서를 남길 마땅한 지필묵이 없어 손바닥크기의 종이에 유서를 남겼고 자결에 사용한 칼도 粧刀(장도)여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는 것. 이러한 고증은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씨 등 국사학자들의 고증과도 일치하는데도 이 기록화는 전연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ref>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1980.02.26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2600329205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2-26&officeId=00032&pageNo=5&printNo=10586&publishType=00020 기사]</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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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閔忠正公(민충정공)은 한복차림에 이른새벽에 자결했고 아침 일찌기 시신을 본가로 옮겨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 외엔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러한 고증은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씨 등 국사학자들의 고증과도 일치하는데도 이 기록화는 전연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ref>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1980.02.26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2600329205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2-26&officeId=00032&pageNo=5&printNo=10586&publishType=00020 기사]</ref><br/>  
 
현재 [[이완식]]의 집 터는 [[민영환 자결터]]로서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조계사]] 경내에는 [[민영환]]의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이완식]]의 집 터는 [[민영환 자결터]]로서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조계사]] 경내에는 [[민영환]]의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2017년 3월 2일 (목) 14:15 판

고증잘못되었음-> 네이버 라이브러리에서 찾을 수 있음.
경술국치라는 사건, 민영환이라는 인물, 민비와 어떤 인척이고, 어떤 관직을 역임했고...
우리가 이건 재밌는 관계다 라는걸 찾아내는데 의미있는거고, 우리가 재미있으면 다른 이에게도 재미있어.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손수광-민충정공순국(민영환)-1976s.jpg
작가 손수광
제작연도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항일
분류 유화
소장처 독립기념관



설명

민영환순국 자결한 장소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 후술할 시종무관 어담(魚潭)의 회고에 따르면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 의해 조계사 경내의 본저(本邸)로 옮겨졌다고 한다.

민씨저가 의외로 조용하기로 집 사람에게 물은즉 괴정동(槐井洞)의 집사 집이라 하기로 또 그리로 뛰어가다가 중도에서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게 떠받들리어 본저(本邸)로 돌아오는 민씨의 유해를 실은 교자(轎子)를 만나게 되어 따라 들어갔다.[1]

그런데 위 민족기록화에 묘사된 배경은 문 밖에 합장하고 있는 승려, 마당의 석등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경내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으므로 고증 상의 오류로 보인다. 경향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 있다.

...閔忠正公(민충정공)은 한복차림에 이른새벽에 자결했고 아침 일찌기 시신을 본가로 옮겨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 외엔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러한 고증은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씨 등 국사학자들의 고증과도 일치하는데도 이 기록화는 전연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2]

현재 이완식의 집 터는 민영환 자결터로서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조계사 경내에는 민영환의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905년 11월 30일 새벽에 홀로 자결한 민경환세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세통의 유서는 작품 왼쪽 아래 위치한 앉은뱅이 책상 위에 그려져 있는데, 작은 명함에 쓰여진 유서 한 통이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이고, 두루마기에 쓰여진 유서 두 통이 미국 공사관에 있는 친지에게 보낸 유서와, 황제에게 올린 유서이다.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은 채로 오른 손목을 그어 자결한 듯 그려져 있으며, 왼손 근처에는 작은 칼이 놓여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최후를 목격했던 김우현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민영환은 한복차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3] 또한, 그가 자결에 사용한 칼과 자결 방법에 대해 여러가지 상반되는 의견들이 있는데, 김우현 목사의 증언과 더불어, 민영환은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자결에 사용한 칼이 장도(粧刀)이고,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실제로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우현 목사와 마찬가지로 자결후 그를 목격했던 시종무관 어담(魚潭)은 그가 오른손에 손톱 깎기만한 작은 칼을 쥔 채로 사망하였고, 할복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여 목을 찔러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 민영환을사조약에 따른 일제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항거하여 자결하는 모습을 그린 민족기록화이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조병세를 소두로 백관들과 연명으로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조병세가 구금된 뒤 자신이 소두가 되어 재차 상소운동을 전개했으나, 나라의 운이 이미 기울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해 국민들을 깨우칠 목적으로



1905년 11월 30일 새벽에 홀로 자결한 민경환세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세통의 유서는 작품 왼쪽 아래 위치한 앉은뱅이 책상 위에 그려져 있는데, 작은 명함에 쓰여진 유서 한 통이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이고, 두루마기에 쓰여진 유서 두 통이 미국 공사관에 있는 친지에게 보낸 유서와, 황제에게 올린 유서이다.

그의 옆에는 과도 크기만한 칼과 유서 세 통이 그려져 있다.
그림에서는 자결한 민영환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나 창백한 얼굴 빛으로 보아 절명한 후로도 몇 시간이 흐른 뒤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아무도 없는 새벽녘에 평소에 가지고 있던 작은 칼로 배와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림 속 민영환의 왼손 밑부분이 그가 이용한 작은 칼이 그려져 있다.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있고, 그러나 당시 자결장소인 이완식의 집에 글공부하러드나들던 김우현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閔忠正公(민충정공)은 한복차림에 이른새벽에 자결했고 아침 일찌기 시신을 본가로 옮겨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 외엔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것. 또 유서를 남길 마땅한 지필묵이 없어 손바닥크기의 종이에 유서를 남겼고 자결에 사용한 칼도 粧刀(장도)여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는 것. 이러한 고증은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씨 등 국사학자들의 고증과도 일치하는데도 이 기록화는 전연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4]



당시 급보를 받고 달려간 시종무관 어담(魚潭)민영환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오전 5시경에 급사로부터 작야(昨夜) 민씨가 자살하였다는 말을 듣고 놀라 민씨저(閔氏邸)로 뛰어갔다. 민씨저가 의외로 조용하기로 집 사람에게 물은즉 괴정동(槐井洞)의 집사 집이라 하기로 또 그리로 뛰어가다가 중도에서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게 떠받들리어 본저(本邸)로 돌아오는 민씨의 유해를 실은 교자(轎子)를 만나게 되어 따라 들어갔다. 곧 교자에서 이불에 쌓인 유해를 모셔내어 침실로 옮겼다. 언뜻 얼굴을 보니 옆으로 두 치 정도의 구멍이 난 목줄기로부터 아직까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원망하는 듯 노한 듯 딱 부릅뜨고 있는 양쪽 눈은 처절하고도 가여웠다. 다음 오른손에 꽉 쥐고 있는 작은 칼을 풀어내고 의복을 벗기니 일(一)자로 할복하고 있었다. 칼을 만져보니 손톱 깎기에 쓰는 퍽 작은 칼로서 깊이 찌를 수 없었기에 다시 상처 위로 좌로 우로 몇 번이나 칼질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의복의 양 무릎에 좌우 손을 닦은 듯한 핏자욱이 묻어 있는데, 생피가 찐덕찐덕하여 작은 칼을 쓰기 어렵게 되자 좌우 손으로 칼을 바꿔 쥐어가며 한 손의 피를 무릎에 닦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같이 하고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목구멍을 옆으로 끊어 젖힌 것이 아닌가! 참으로 장절한 죽음이었다.[5]

그림에서는 민영환 손목/ but 실제로는 할복, 목



...그러나 당시 자결장소인 이완식의 집에 글공부하러드나들던 김우현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閔忠正公(민충정공)은 한복차림에 이른새벽에 자결했고 아침 일찌기 시신을 본가로 옮겨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 외엔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것. 또 유서를 남길 마땅한 지필묵이 없어 손바닥크기의 종이에 유서를 남겼고 자결에 사용한 칼도 粧刀(장도)여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는 것. 이러한 고증은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씨 등 국사학자들의 고증과도 일치하는데도 이 기록화는 전연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6]



그의 주위에는 관복과 한복 차림을 한 사람 8명이 둘러서 침통해하는 모습을 담고 대낮인 문밖에는 불승(佛僧)이 염불을 외고 하인부부가 얘기를 나누는 것이 그려져있다. 또, 민영환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평양대 일등병 김봉학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민영환은 먼저 수일 동안 소두로 활약하느라 약해진 몸을 추스르게 위해 전동에 있는 회화 나뭇골, 지금의 공평동에 사는 의관 이완식의 집을 찾았다. 이때 민영환은 정부 사정과 국내 정세를 생각하며 새로운 구국의 길을 구상하였다. 고종에게 상소를 올린다고 해서 성과를 거두기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맞서 그들을 물리쳐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동시에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1월 29일 오후에 민영환은 서대문 밖에 있는 본가에 가서 생모 서씨와 아내 박씨를 찾아 마음속으로 작별을 하였다. 그리고 이완식의 집(현 공평빌딩 앞)으로 돌아와서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친 뒤에 문을 잠그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이튿날 11월 30일 아침 6시경에 아무도 모르게 평소 가지고 있던 작은 칼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칼로 복부를 찔렀지만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손에 묻은 피를 벽과 의복에 여러 번 문질러 씻고 난 뒤에 다시 찌르고 하였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나중에는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여 순절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순절 후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04583&cid=49352&categoryId=49352




http://m.blog.daum.net/jidam55/16144294

http://beup604.egloos.com/m/16750


http://museum.korea.ac.kr/html/gallery.htm


http://blog.naver.com/tbfkfk01/220888760658


시각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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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록화 작품 시각화 예시

관련 민족기록화

항일운동 소재 작품

관련항목

노드 관계 노드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에 의해 그려지다 손수광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에 소장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을 소재로 삼다 민영환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을 배경으로 하다 민영환 자결터

시간정보

중심 시간정보명 시간값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제작연도 1976년

공간정보

중심 연결정보 공간정보이름 경도 위도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前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37.4312234 127.0182276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現 소장처 독립기념관 36.7835383 127.2210151

그래프

참고문헌

주석

  1. 조정래, <아리랑 1: 조정래 대하소설>, 해냄, 2001, 325쪽;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291쪽.
  2.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1980.02.26 기사
  3.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1980.02.26(2017년 3월 2일 확인)
  4.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1980.02.26(2017년 3월 2일 확인)
  5. 조정래, <아리랑 1: 조정래 대하소설>, 해냄, 2001, 325쪽;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291쪽.
  6.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1980.02.26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