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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 (금) 22:58 판
봉래의 (別司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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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봉래의 |
---|---|
한자표기 | 別司甕 |
목차
정의
조선 전기에 창제된 정재(呈才:대궐 안의 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를 위한 무용 음악이다.
내용
봉래의의 탄생과 구성
1445년 4월 세종의 명으로 권제(權蹏)·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의 가사에 맞추어 작곡된 음악을 지칭하는 말로서, 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던 정재 및 무용 음악의 총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음악은 전인자(前引子)·여민락(與民樂)·치화평(致和平)·취풍형(醉豐亨)·후인자(後引子) 등 다섯 개의 곡으로 구성되었다. 악보는 『세종실록』 권140∼145 사이에 전하며, 춤사위에 관한 기록은 『악학궤범』 권5에 전한다. [1]
봉래의의 변천과 정재무도홀기
조선 초기의 봉래의는 조선 말기에 이르는 동안 역사적 변천을 거치게 되었고, 따라서 춤의 반주음악도 본래의 봉래의 대신에 다른 음악으로 바뀌게 되었다. 고종 때의 문헌인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의하면 봉래의 정재의 반주음악은 여민락(與民樂)·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치화평지곡(致和平之曲)·취풍형지곡(醉豐亨之曲)·등 이었다. 이렇게 조선 말기까지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봉래의 정재와 그 반주음악의 전통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문헌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지식관계망
- 홀기류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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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연시 무동 각 정재 무도 홀기 | 봉래의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봉래의 | 용비어천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악학궤범 | 봉래의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시각자료
영상
- "세종대왕 탄신 619돌, 숭모제전을 가다", 문화유산뉴스,
『문화유산채널』online , 한국문화재재단.
갤러리
주석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 박혜정,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더불어」의 정서가 깃들어있는 음악, '여민락與民樂'", 명사칼럼,
『문화유산채널』online , 한국문화재재단, 작성일: 2012년 6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