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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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일 (목) 04:44 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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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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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이칭 |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
주소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47호 |
문화재 지정일 | 1962.12.20 |
찬자 | 최치원(崔致遠) |
서자 | 최치원(崔致遠) |
각자 | 환영(奐榮) |
서체 | 전서(篆書) |
승려 | 혜소(慧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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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혜소(慧昭)의 탑비.
탑비
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 보물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귀부(龜趺)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 이수에는 보주를 다투는 반룡(蟠龍: 승천하지 아니한 용)이 힘차게 조각되었고,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전액(篆額)이 양각되었으며, 그 위로 앙련판(仰蓮瓣) 위에 보주를 얹었다.[1]
850년 선사가 입적하고 삼기(三紀, 36년)가 지난 뒤, 헌강왕이 시호를 진감선사라 추증하고, 탑이름을 대공령탑이라 하였다.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참된 종교(禪宗)를 흠앙하시어 '진감선사(眞鑑禪師)'라고 추시하시고 탑이름을 '대공령탑'이라 하셨다. 그리고 전각을 허락하여 길이 명예를 전하도록 하시었다.[2] | ||
출처: |
그러나 비석이 세워지기 전에 헌강왕이 죽고 뒤이어 정강왕이 즉위하였다. 정강왕은 최치원에게 명하여 비명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정강왕 2년(887년)에 비가 세워진다. 환영(奐榮) 스님이 글자를 새겼다.
비문
가상현실
- 차후 있을 답사 후 보완..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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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
관련항목
node | relation | no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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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를 위한 비이다 | 혜소(惠昭)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에 위치한다 | 하동 쌍계사(河東 雙磎寺)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가 비문을 지었다 | 최치원(崔致遠)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가 비문을 썼다 | 최치원(崔致遠)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가 비문을 새겼다 | 환영(奐榮)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로 불려진다 | 사산비명(四山碑銘)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의 이름을 지었다 | 헌강왕 |
각주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