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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1672년부터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평택현감,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상령군수·종부시주부·사헌부장령·사헌부집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709년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부터 [[강화학파]]의 연원이 시작되었다. | + |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1672년부터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평택현감,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상령군수·종부시주부·사헌부장령·사헌부집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709년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부터 [[강화학파]]의 연원이 시작되었다. 호조참의·강원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한성부좌윤 등의 관직을 거쳐 1722년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성균관좨주·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28년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ref>금장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865 정제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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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두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다가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나, 그는 확고한 신념으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하였다.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와 「여명체용도(麗明體用圖)」를 그려서 양명학의 심성론과 양지론의 도상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심즉리를 받아들여 주자가 마음[心]과 이(理)를 구별하는 것을 비판하고 마음과 이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며, 이와 기(氣)의 이원화도 거부하고 이기합일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아들 [[정후일 | 정후일(鄭厚一)]]을 비롯하여 [[윤순 | 윤순(尹淳)]], [[김택수 | 김택수(金澤秀)]], [[이광사 | 이광사(李匡師)]] 형제 등이 그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그가 속하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강화학파]]라는 이름 아래 강화도를 중심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 채 계승되어갔다.<ref>금장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865 정제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정제두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다가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나, 그는 확고한 신념으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하였다.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와 「여명체용도(麗明體用圖)」를 그려서 양명학의 심성론과 양지론의 도상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심즉리를 받아들여 주자가 마음[心]과 이(理)를 구별하는 것을 비판하고 마음과 이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며, 이와 기(氣)의 이원화도 거부하고 이기합일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아들 [[정후일 | 정후일(鄭厚一)]]을 비롯하여 [[윤순 | 윤순(尹淳)]], [[김택수 | 김택수(金澤秀)]], [[이광사 | 이광사(李匡師)]] 형제 등이 그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그가 속하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강화학파]]라는 이름 아래 강화도를 중심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 채 계승되어갔다.<ref>금장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865 정제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2017년 11월 15일 (수) 05:53 판
정제두(鄭齊斗) | |
대표명칭 | 정제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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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鄭齊斗 |
생몰년 | 1649-1736 |
본관 | 영일(迎日) |
시호 | 문강(文康) |
호 | 하곡(霞谷) |
자 | 사앙(士仰) |
출생지 | 서울의 반석방(盤石坊)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부 | 정상징(鄭尙徵) |
모 | 이기조(李基祚)의 딸 한산 이씨 |
정의
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내용
생애
정제두의 11대조는 고려 말의 절의지사로 잘 알려진 정몽주(鄭夢周)이며, 조부인 정유성(鄭維城)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의정에까지 이르며 현종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정제두는 부족함 없이 송준길을 비롯한 여러 정계 인사 및 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정제두는 박세채(朴世采)의 제자로 윤증(尹拯)과도 학문적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1]
관직활동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1672년부터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평택현감,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상령군수·종부시주부·사헌부장령·사헌부집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709년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부터 강화학파의 연원이 시작되었다. 호조참의·강원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한성부좌윤 등의 관직을 거쳐 1722년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성균관좨주·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28년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2]
학문과 업적
정제두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다가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나, 그는 확고한 신념으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하였다.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와 「여명체용도(麗明體用圖)」를 그려서 양명학의 심성론과 양지론의 도상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심즉리를 받아들여 주자가 마음[心]과 이(理)를 구별하는 것을 비판하고 마음과 이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며, 이와 기(氣)의 이원화도 거부하고 이기합일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아들 정후일(鄭厚一)을 비롯하여 윤순(尹淳), 김택수(金澤秀), 이광사(李匡師) 형제 등이 그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그가 속하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강화학파라는 이름 아래 강화도를 중심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 채 계승되어갔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