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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1일 (토) 21:41 판
조선 세조(朝鮮 太祖) | |
대표명칭 | 조선 세조 |
---|---|
한자표기 | 朝鮮 太祖 |
생몰년 | 1417년 11월 2일-1468년 9월 23일 |
본관 | 전주(全州) |
이칭 | 이유(李瑈) |
시호 |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
자 | 수지(粹之) |
시대 | 조선 |
배우자 |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 |
부 | 조선 세종 |
모 | 소헌왕후 심씨 |
전임자 | 조선 단종 |
후임자 | 조선 예종 |
능묘 | 광릉(光陵) |
성격 | 왕 |
유형 | 인물 |
목차
정의
1417(태종 17)-1468(세조 14). 조선 제7대 왕.
내용
가계와 탄생
재위 1455년(세조 1)∼1468년(세조 1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1]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했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2]
왕위찬탈: 계유정난
단종은 1452년 5월 18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종은 어린아들을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 원로대신에게 부탁했고, 이러한 구도는 당장 수양대군∙안평대군 등 종친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단종 즉위 이후 정국은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든 황보인·김종서파로 나뉘게 되었다.[3]
이러한 대결구도는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불리는 기습 공격을 앞세운 수양대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수양대군은 무방비 상태의 김종서와 황보인을 철퇴로 격살하였고 문인들의 신망을 받았던 라이벌 안평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내 버렸다. 당시 수양대군의 핵심참모였던 한명회(韓明澮)는 쿠데타에 대비하여 살생부를 작성했는데, 입궐하는 대신들을 향해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면 모조리 죽이는 식이었다.[4]
쿠데타의 명분은 약했고, 어린 단종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영의정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은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고 군권을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세운 공을 주공(周公)에 비유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에게 교서를 작성하게 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柳誠源)만이 남아 있다가 협박 속에 초안을 작성했다.[5]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5년 윤 6월 11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형식적으로는 양위였지만, 숙부의 위세에 눌려 왕위를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왕의 옥새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이가 성삼문(成三問)이었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이 옥새를 부여안고 대성통곡을 하자 세조가 성삼문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았다고 전한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금성대군집에 살게 했다. 말이 좋아 상왕이지 가택연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단종의 거처에는 군사 10명을 거느린 삼군진무 2명을 배치하여 주야로 경계와 감시를 하도록 했다.[6]
이시애의 난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帥臣: 병마절도사)에 그 지방 출신을 등용하는 것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켰다.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다.[7]
세조의 치적
세조는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의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1467)을 계기로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8]
국방력 신장에 힘써 호적(戶籍)·호패제(戶牌制)를 강화,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中央軍)을 5위(五衛) 제도로 개편하였다. 북방개척에도 힘써 1460년(세조 6) 북정(北征)을 단행,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野人)을 소탕하게 하고, 1467년(세조 13)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康純) ·남이(南怡)·어유소(魚有沼) 등으로 건주(建州)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 백성을 평안·강원·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9]
경제정책에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또한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비(妃)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10]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자 집현전을 폐지하였으나 문교면에도 진력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그는 즉위 전에 《역대병요(歷代兵要)》 《오위진법(五衛陣法)》을 편찬했으며, 1465년(세조 11)에는 발영 ·등준시(拔英登俊試)를 두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훈사십장(訓辭十章)》, 《병서대지(兵書大旨)》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經濟六典)》, 《속육전(續六典)》, 《원육전(元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법전과 교령(敎令)·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崔恒)·노사신(盧思愼)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을 보게 한 것은 그의 치적 중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信眉)·김수온(金守溫) 등에게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大藏經)》 50권을 필인(畢印)하기도 했다. 그의 능은 경기 남양주시의 광릉(光陵)이다.[11]
지식관계망
- 세종의 한글 창제와 서적 편찬에 관한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조선 세조 | 조선 세종 | A는 B의 아들이다 | |
조선 세조 | 정희왕후 윤씨 | A는 B의 남편이다 | |
조선 세조 | 김종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사육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김수온 | 조선 세조 | A는 B의 신하이다 | |
조선 세조 | 호패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신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권람 | 조선 세조 | A는 B의 신하이다 | |
한명회 | 조선 세조 | A는 B의 신하이다 | |
양성지 | 조선 세조 | A는 B의 신하이다 | |
조선 예종 | 조선 세조 | A는 B의 아들이다 | |
조선 세조 | 동국통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경국대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직전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이시애의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국조보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단종복위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광릉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문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석보상절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월인석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역대병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남양주 수종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조 | 평창 상원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이재호, "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재호, "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성희, "세조",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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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거리
- 김경수, 「세조의 집권과 권력 변동」, 『백산학보』 99, 백산학회, 2014, 39-77쪽.
- 김영두, 「단종충신 追復 논의와 세조의 사육신 인식」, 『사학연구』 98, 한국사학회, 2010, 1-39쪽.
- 김용흠, 「조선 세조대 정치를 보는 시각과 생육신」, 『역사와 현실』 64, 한국역사연구회, 2007, 223-263쪽.
- 김윤식, 「朝鮮 世祖의 學術活動과 書籍文化에 대한 考察」, 『서지학연구』 29, 서지학회, 2004, 15-48쪽.
- 박정민, 「조선 세조대 여진인 來朝와 귀속문제」, 『전북사학』 41, 전북사학회, 2012, 77-116쪽.
- 박진, 「朝鮮 世祖의 宗親 양성과 軍事的 역할」, 『군사』 7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97-129쪽.
- 박현모, 「세조(世祖)의 국정운영 방식 연구」, 『한국사연구』 161, 한국사연구회, 2013, 251-281쪽.
- 이재호, "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현지, 「세조 어제시 연구」, 『한국고전연구』 22, 한국고전연구학회, 2010, 319-356쪽.
- 정성희, "세조", 인물한국사,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진성규, 「世祖의 佛事行爲와 그 意味」, 『백산학보』 78, 백산학회, 2007, 165-193쪽.
- 최선혜, 「조선 세조대 강론(講論)의 시행과 유신(儒臣)의 성장」, 『역사학연구』 57, 호남사학회, 2015, 1-43쪽.
- 최승희, 「세조대 (世祖代) 국정운영체제」, 『조선시대사학보』 5, 조선시대사학회, 1998, 1-55쪽.
- 최정용, 『조선조 세조의 국정운영』, 신서원, 2000.
- 한충희, 「朝鮮(조선) 世祖代(세조대)(1455-1468) 原從功臣硏究(원종공신연구)-1,2等功臣(등공신)을 중심으로-」, 『조선사연구』 22, 조선사연구회, 2013, 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