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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징|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헌안왕의 명을 받아 다약(茶藥)을 받들고 가서 그를 맞았다. 그 뒤 체징이 [[가지산문|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한 후에는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어 사재(私財)로 철 2,500근을 사서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한 구를 만들어 봉헌(奉獻)하는 등 [[구산선문|선종구산]] 중 가지산파의 후원에 크게 힘썼다.<ref>"김언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7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f>
 
[[체징|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헌안왕의 명을 받아 다약(茶藥)을 받들고 가서 그를 맞았다. 그 뒤 체징이 [[가지산문|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한 후에는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어 사재(私財)로 철 2,500근을 사서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한 구를 만들어 봉헌(奉獻)하는 등 [[구산선문|선종구산]] 중 가지산파의 후원에 크게 힘썼다.<ref>"김언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7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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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하반부를 쓴 장사부수(長沙副守) 김언경(金彦卿) 역시 입조사(入朝使)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라 하여 유학생 출신임을 나타내는데, 장사현은 지금 보림사가 있는 장흥의 옛이름이다.<ref>최완수,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1253/1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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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년(헌덕왕 13) 신라인으로는 처음으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김운경(金雲卿)과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김언경과 김운경은 양자의 활동 상황을 감안할 때 별개의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경명왕비장사택(長沙宅)의 조부인 이찬(伊飡) 김수종(金水宗) 또는 김수종(金遂宗, 邃宗)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ref>"김언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7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f>
 
821년(헌덕왕 13) 신라인으로는 처음으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김운경(金雲卿)과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김언경과 김운경은 양자의 활동 상황을 감안할 때 별개의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경명왕비장사택(長沙宅)의 조부인 이찬(伊飡) 김수종(金水宗) 또는 김수종(金遂宗, 邃宗)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ref>"김언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7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f>
  

2017년 3월 1일 (수) 18:22 판

김언경()
[[file:|270px|thumb|center|]]
대표명칭 김언경



정의

신라 하대의 관리·서예가.

개요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헌안왕의 명을 받아 다약(茶藥)을 받들고 가서 그를 맞았다. 그 뒤 체징이 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한 후에는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어 사재(私財)로 철 2,500근을 사서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한 구를 만들어 봉헌(奉獻)하는 등 선종구산 중 가지산파의 후원에 크게 힘썼다.[1]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머리에서 7행까지는 김원(金薳)해서(楷書)로 썼고, 7행의 선(禪)자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로 썼다.[2]

논쟁

비석의 하반부를 쓴 장사부수(長沙副守) 김언경(金彦卿) 역시 입조사(入朝使)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라 하여 유학생 출신임을 나타내는데, 장사현은 지금 보림사가 있는 장흥의 옛이름이다.[3]


821년(헌덕왕 13) 신라인으로는 처음으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김운경(金雲卿)과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김언경과 김운경은 양자의 활동 상황을 감안할 때 별개의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경명왕비장사택(長沙宅)의 조부인 이찬(伊飡) 김수종(金水宗) 또는 김수종(金遂宗, 邃宗)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4]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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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는 -가 비문을 썼다 김언경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는 -가 봉헌하였다 김언경

참고문헌

주석

  1. "김언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 "김언경",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3.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
  4. "김언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