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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민보(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br/> | 첫째 민보(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br/> | ||
− | 둘째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 + | 둘째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2만 냥을 강제로 빼앗았다. |
셋째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각을 건조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1,000여 냥을 거두었다.<br/> | 셋째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각을 건조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1,000여 냥을 거두었다.<br/> | ||
넷째 대동미 16두씩을 좋은 쌀로 거둬들인 후 나쁜 쌀로 바꾸어 상납하고 그 이익을 착복하였다.<br/> | 넷째 대동미 16두씩을 좋은 쌀로 거둬들인 후 나쁜 쌀로 바꾸어 상납하고 그 이익을 착복하였다.<br/> | ||
− | 그밖에 | + | 그밖에 백성들을 불효·불목·음행·잡기 등의 죄로 무고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
|출처= 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출처= 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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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7일 (화) 00:13 판
고부민란(古阜民亂) | |
대표명칭 | 고부민란 |
---|---|
한자표기 | 古阜民亂 |
유형 | 농민운동 |
시대 | 조선 |
날짜 | 1894년 1월 |
관련인물 | 전봉준, 조병갑 |
관련단체 | 동학 |
관련장소 | 고부 |
목차
정의
1894년(조선 고종 31) 1월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이다.[1]
내용
조병갑의 탐학
1892년(고종 29)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趙秉甲)은 기회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였다. 후일 전봉준이 술회한 공초(供草)에 의하면, 조병갑의 침학(侵虐)의 세목은 다음과 같다.[2]
첫째 민보(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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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수, "동학운동", |
1893년 12월 농민들은 우선 억울한 사정을 민소(民訴)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폭발한 민심
이에 전봉준은 1월 10일 새벽 고부읍의 3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가자 조병갑은 달아났다.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옥을 파괴하여 억울한 죄인을 석방하고,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반환하였으며, 민원의 대상이 된 만석보도 파괴하였다. 약 1주일간에 걸쳐 관아의 폐정을 처리한 뒤, 주력부대를 마항장으로 옮기고 일부는 읍에 잔류시켰다. 그 뒤 1월 25일 전군을 요새지인 백산성으로 옮겼다. 소식을 들은 각 처의 농민군이 전봉준의 휘하에 집결하여 전면전쟁을 벌일 기세였다.[5] 정부에서는 새로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샀다.[6] 그리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전봉준 | 고부민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조병갑 | 고부민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고부민란 |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고부민란 | 백산성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 ↑ 김의환, "고부민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숭교, "동학 농민 운동",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