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단속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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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속사(斷俗寺) | + | 단속사(斷俗寺)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748년([[신라 경덕왕|경덕왕]] 7) 왕의 총신(寵臣) [[이준|이준(李俊/李純)]]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개창(改創)하여 단속사라 했다는 설과, 763년([[신라 경덕왕|경덕왕]] 22)에 현사(賢士) [[신충|신충(信忠)]]이 벼슬에서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삭발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했다는 설이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37414 단속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우리나라 금석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행|신행(信行)]]의 부도비 그리고 대감국사 [[탄연|탄연(坦然)]]의 비 등도 이곳 단속사에 있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참조:"[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820&cid=42840&categoryId=42851 단속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지리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당에서 북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선사 [[신행]]이 779년([[신라 혜공왕|혜공왕]] 15)에 | + | 우리나라 금석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행|신행(信行)]]의 부도비 그리고 대감국사 [[탄연|탄연(坦然)]]의 비 등도 이곳 단속사에 있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참조:"[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820&cid=42840&categoryId=42851 단속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지리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당에서 북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선사 [[신행]]이 779년([[신라 혜공왕|혜공왕]] 15)에 이곳에서 입적하였으며, 813년([[신라 헌덕왕|헌덕왕]])에 당시의 병부령 김헌정이 비문을 지은 신행의 비석이 세워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단속사가 위치한 골짜기 입구에는 골 입구에 [[최치원|최치원(崔致遠)]]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과 함께 최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는데, 그 독서당은 훗날 고려시대의 고승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탄연(坦然)]]의 영당(影堂)으로 쓰였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때의 유명한 화공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거사상(維摩居士象)이 단속사에 있었다고 한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B%8B%A8%EC%86%8D%EC%82%AC%EC%A7%80 단속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ref>장충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3603 단속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이규보가 지은 [[혜심|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惠諶)]]의 비문에는 [[혜심]]이 1220년([[고려 고종|고종]] 7)에 단속사에 주지로 | + | 이규보가 지은 [[혜심|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惠諶)]]의 비문에는 [[혜심]]이 1220년([[고려 고종|고종]] 7)에 단속사에 주지로 머무른 적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조선 초기인 1412년([[조선 세종|세종 6]]) 당시에는 원속전 1백 결에 주석하는 승려가 1백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B%8B%A8%EC%86%8D%EC%82%AC%EC%A7%80 단속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하지만 1568년(선조 1) 유생(儒生)들에 의해 불상(佛像)·경판(經板) 등이 파괴되고, 이어서 [[정유재란|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타버린 후 | + | 하지만 1568년([[조선 선조|선조]] 1) 유생(儒生)들에 의해 불상(佛像)·경판(經板) 등이 파괴되고, 이어서 [[정유재란|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타버린 후 재건했으나 현재는 폐사되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37414 단속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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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강회백|강회백(姜淮伯)]]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단속사에서 글을 | +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강회백|강회백(姜淮伯)]]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단속사에서 글을 읽으며 심은 매화가 경내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강회백이 지낸 벼슬인 정당문학의 이름을 따서 정당매(政堂梅)라 불렀는데, 매화나무가 말라 죽으면 그 후손들이 그 자리에 다른 매화를 이어 심었다고 하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추강 [[남효온|남효온(南孝溫)]]부터 [[김종직|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탁영 [[김일손|김일손(金馹孫)]], 지리산에 자주 올랐던 조선 중기의 문인 [[조식|조식(曺植)]]까지, 이 정당매를 보고 지은 시가 남아 전한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B%8B%A8%EC%86%8D%EC%82%AC%EC%A7%80 단속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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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6일 (월) 15:29 판
산청 단속사 (山淸 斷俗寺) |
|
대표명칭 | 산청 단속사 |
---|---|
한자 | 山淸 斷俗寺 |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
|
정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 있는 절.
내용
단속사(斷俗寺)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748년(경덕왕 7) 왕의 총신(寵臣) 이준(李俊/李純)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개창(改創)하여 단속사라 했다는 설과, 763년(경덕왕 22)에 현사(賢士) 신충(信忠)이 벼슬에서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삭발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했다는 설이다.[1]
우리나라 금석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행(信行)의 부도비 그리고 대감국사 탄연(坦然)의 비 등도 이곳 단속사에 있었다.[2] 당에서 북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선사 신행이 779년(혜공왕 15)에 이곳에서 입적하였으며, 813년(헌덕왕)에 당시의 병부령 김헌정이 비문을 지은 신행의 비석이 세워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단속사가 위치한 골짜기 입구에는 골 입구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과 함께 최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는데, 그 독서당은 훗날 고려시대의 고승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의 영당(影堂)으로 쓰였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때의 유명한 화공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거사상(維摩居士象)이 단속사에 있었다고 한다[3][4]
이규보가 지은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惠諶)의 비문에는 혜심이 1220년(고종 7)에 단속사에 주지로 머무른 적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조선 초기인 1412년(세종 6) 당시에는 원속전 1백 결에 주석하는 승려가 1백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5]
하지만 1568년(선조 1) 유생(儒生)들에 의해 불상(佛像)·경판(經板) 등이 파괴되고, 이어서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타버린 후 재건했으나 현재는 폐사되었다.[6]
정당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강회백(姜淮伯)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단속사에서 글을 읽으며 심은 매화가 경내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강회백이 지낸 벼슬인 정당문학의 이름을 따서 정당매(政堂梅)라 불렀는데, 매화나무가 말라 죽으면 그 후손들이 그 자리에 다른 매화를 이어 심었다고 하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추강 남효온(南孝溫)부터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탁영 김일손(金馹孫), 지리산에 자주 올랐던 조선 중기의 문인 조식(曺植)까지, 이 정당매를 보고 지은 시가 남아 전한다.[7]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신행선사비 | 산청 단속사 | A는 B에 있었다 | |
산청 단속사 | 탄연 | A는 B와 관련있다 | |
산청 단속사 | 신행 | A는 B와 관련있다 | |
산청 단속사 | 최치원 | A는 B와 관련있다 | |
혜심 | 산청 단속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779년 | 신행이 산청 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 |
813년 | 산청 단속사에 신행의 비석이 세워졌다 |
시각자료
영상
- 애국채널 snsTV, "산청엑스포TV 산청 단속사(斷俗寺)지(址)의 정당매를 찾아서~~", YouTube, 게시일: 2013년 5월 25일.
주석
- ↑ "단속사",
『두산백과』online .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참조:"단속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지리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단속사지",
『위키백과』online . - ↑ 장충식, "단속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단속사지",
『위키백과』online . - ↑ "단속사",
『두산백과』online . - ↑ "단속사지",
『위키백과』online .
참고문헌
- "단속사",
『두산백과』online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참조:"단속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지리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단속사지",
『위키백과』online . - 장충식, "단속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