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사의 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사건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 흥왕사의 변 |한자표기= 興王寺─變 |영문명칭= |이칭= |유형= |시대= 고려시대 |날짜= 1363년 |관련...)
 
20번째 줄: 20번째 줄:
  
 
=='''내용'''==
 
=='''내용'''==
1359년에 뒤이어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 10여 만의 무리가 재차 침입하였다. 이 때 정세운(鄭世雲)이 총병관(摠兵官 : 총사령관)이 되어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김용·최영(崔瑩) 등과 함께 싸워 적을 물리쳤다.
+
1359, 1361년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난|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 공민왕|공민왕]]은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신했고, 1362년 전란이 평정된 뒤, 환도하여 1363년 2월에 [[개성 흥왕사|흥왕사(開城 興王寺)]]를 머물 곳으로 삼았다.<ref>왕뚜껑열려, "[http://tip.daum.net/question/38936029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팁』<sup>online</sup></online></html>.</ref>
이렇게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군공(軍功)을 시기하여 서로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김용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안우·이방실·김득배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그 죄를 뒤집어씌워 모두 죽였다.
 
그리고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돌아와 흥왕사의 행궁에서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결국 공민왕은 환자(宦者) 이강달(李剛達)의 기지로 변을 면하였으나, 용모가 비슷한 안도치(安都赤)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변은 최영 등이 군사를 이끌고 행궁에 이르러 토벌함으로써 끝나게 되었지만, 김용은 오히려 1등공신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곧 그 사실이 발각되자 김용은 그 동안의 공로가 있다 하여 죽음은 면하였으나 밀성군(密城郡 :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에 귀양가게 되었다.
 
다시 계림부(鷄林府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로 옮긴 뒤 사지가 잘려 전국에 돌려지고 개성에 보내져 효수(梟首)되었다.
 
  
 +
이렇게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공적(功績)을 두고 서로 싸우는 일이 일어났다. [[김용|김용(金鏞)]]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정세운(鄭世雲)]]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정세운을 죽게 했다. 그리고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돌아와 [[개성 흥왕사|흥왕사]]의 행궁(行宮)에 거처하던 [[고려 공민왕|공민왕]]을 죽이고자 했다. 결국 [[고려 공민왕|공민왕]]은 [[이강달|이강달(李剛達)]]의 기지로 변을 면했으나, 용모가 비슷한 [[안도치|안도치(安都赤)]]가 죽게 되었다. 이 변은 [[최영|최영(崔瑩)]] 등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여 끝나게 되었다.<ref>민병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41 흥왕사의 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사건이 끝난 직후, 처음에 [[김용]]은 반란군 진압에 나서는 등의 행위로 위기를 모면했으나, 곧 그의 음모가 드러나 체포되어 밀성(密城,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으로 귀양갔다가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로 옮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ref>왕뚜껑열려, "[http://tip.daum.net/question/38936029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팁』<sup>online</sup></online></html>.</ref>
  
 
1359, 1361년의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은 복주(福州 : 안동)로 피신했고, 1362년 전란이 평정된 뒤 환도하여 1363년 2월에 흥왕사를 시어궁(侍御宮)으로 삼고 그곳에 머물렀다.
 
 
그해 3월 부원배들과 결탁한 김용은 반원개혁정책을 시도했던 공민왕을 살해하기 위해 흥왕사에 그의 도당 50여 명을 보내 침범하게 했다. 이에 왕의 호위인원은 다 달아났으며 안도적(安都赤)·왕자(王梓)·김한룡(金漢龍)·홍언박(洪彦博)은 김용의 일당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최영(崔瑩)·우제(禹)·안우경(安遇慶)·김장수(金長壽) 등이 서울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반란을 평정했다. 왕은 이인복(李仁復)·정찬(丁贊)·우제·홍선복(洪善福)에게 명령하여 역적들을 순군(巡軍)에서 국문하게 했으며 곧바로 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을 봉록했다.
 
 
김용은 초기에는 반란군 진압에 나서는 등의 행위로 모면했으나 그의 음모가 드러나서 곧 체포되어 밀성(密城 : 지금의 밀양)으로 귀양갔다가 계림부(鷄林府 : 지금의 경주)로 옮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관계정보===
39번째 줄: 31번째 줄: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 [[덕흥군 옹립사건]] || [[덕흥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흥왕사의 변]] || [[김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 [[덕흥군 옹립사건]] || [[고려 공민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흥왕사의 변]] || [[고려 공민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50번째 줄: 42번째 줄:
 
===인용 및 참조===
 
===인용 및 참조===
 
*웹자원
 
*웹자원
 
+
** 민병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41 흥왕사의 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왕뚜껑열려, "[http://tip.daum.net/question/38936029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팁』<sup>online</sup></online></html>.
  
 
[[분류:역사인물초상화]] [[분류:사건]]
 
[[분류:역사인물초상화]] [[분류:사건]]

2017년 11월 6일 (월) 14:15 판

흥왕사의 변(興王寺─變)
대표명칭 흥왕사의 변
한자표기 興王寺─變
시대 고려시대
날짜 1363년
관련인물 고려 공민왕, 김용(金鏞)
관련장소 개성 흥왕사(開城 興王寺)



정의

1363년 김용(金鏞)흥왕사(興王寺)의 행궁(行宮)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한 사건.

내용

1359, 1361년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은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신했고, 1362년 전란이 평정된 뒤, 환도하여 1363년 2월에 흥왕사(開城 興王寺)를 머물 곳으로 삼았다.[1]

이렇게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공적(功績)을 두고 서로 싸우는 일이 일어났다. 김용(金鏞)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鄭世雲)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정세운을 죽게 했다. 그리고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돌아와 흥왕사의 행궁(行宮)에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했다. 결국 공민왕이강달(李剛達)의 기지로 변을 면했으나, 용모가 비슷한 안도치(安都赤)가 죽게 되었다. 이 변은 최영(崔瑩) 등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여 끝나게 되었다.[2]

사건이 끝난 직후, 처음에 김용은 반란군 진압에 나서는 등의 행위로 위기를 모면했으나, 곧 그의 음모가 드러나 체포되어 밀성(密城,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으로 귀양갔다가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로 옮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3]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흥왕사의 변 김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흥왕사의 변 고려 공민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왕뚜껑열려,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Daum 팁』online.
  2. 민병하, "흥왕사의 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왕뚜껑열려,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Daum 팁』online.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