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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원은 진찬당상(進饌堂上) 6인, [[낭청|낭청(郎廳)]] 8인, 별간역(別看役) 4인, 패장(牌將) 35인, 계사(計士) 2인, 서리(書吏) 13인, 서사(書寫) 1인, 고직(庫直) 4인, 사령(使令) 15인, 군사(軍士) 5인, 관사환(官士喚) | + | 인원은 진찬당상(進饌堂上) 6인, [[낭청|낭청(郎廳)]] 8인, 별간역(別看役) 4인, 패장(牌將) 35인, 계사(計士) 2인, 서리(書吏) 13인, 서사(書寫) 1인, 고직(庫直) 4인, 사령(使令) 15인, 군사(軍士) 5인, 관사환(官士喚) 6인 등으로 구성되었다.<ref>『憲宗戊申進饌儀軌』, 「座目」</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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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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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4일 (토) 13:56 기준 최신판
진찬소(進饌所) | |
대표명칭 | 진찬소 |
---|---|
한자표기 | 進饌所 |
창립일 | 1847년 11월 15일 |
해체일 | 1849년 |
주요업무 | 『헌종무신진찬의궤』 편찬 및 간행 |
담당업무 | 진찬례(進饌禮) |
관련기관 | 예조(禮曹) |
정의
1848년(헌종 14), 진찬례(進饌禮)를 주관하고 『헌종무신진찬의궤(憲宗戊申進饌儀軌)』를 편찬하기 위하여 설치된 임시관서이다.
내용
업무
1848년(헌종 14)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60세를 맞이하고 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가 마흔을 넘겨 오십을 바라본다는 망오(望五)를 맞이하여 진찬례를 거행하였다.[1] 진찬례는 준비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진찬소는 이보다 한해 앞서 설치되어 행사를 계획하였다.[2] 행사는 3월 17일 창경궁 통명전에서 헌종ㆍ효현왕후(孝顯王后)ㆍ경빈(慶嬪)이 대왕대비에게 3작을 올리고, 왕ㆍ왕비ㆍ경빈ㆍ내명부ㆍ외명부ㆍ종친ㆍ의빈ㆍ척신이 치사를 올렸다. 이때 왕대비 신정왕후는 부친 조만영(趙萬永)의 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3월 19일에는 창경궁 통명전에서 회작례(會酌禮)를 행하고 저녁에 야연(夜讌)을 행했다. 진찬을 마치고 나서는 3월 21일 진찬소 당상과 낭청 이하에게 상을 내림으로써 행사를 끝마쳤다.[3] 행사의 모든 내용은 『헌종무신진찬의궤』로 작성하여 보관하였다.
구성
인원은 진찬당상(進饌堂上) 6인, 낭청(郎廳) 8인, 별간역(別看役) 4인, 패장(牌將) 35인, 계사(計士) 2인, 서리(書吏) 13인, 서사(書寫) 1인, 고직(庫直) 4인, 사령(使令) 15인, 군사(軍士) 5인, 관사환(官士喚) 6인 등으로 구성되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진찬소 | 진찬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진찬소 | 헌종무신진찬의궤 | A는 B를 편찬하였다 | A dcterms:publisher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848년 3월 17일 | 진찬소는 진찬례를 창경궁 통명전에서 거행하였다 |
1849년 | 헌종무신진찬의궤를 편찬하였다. |
주석
- ↑ 『憲宗實錄』 13년(1847) 3월 17일: 「行進饌禮」.
- ↑ 『憲宗實錄』 13년(1847) 3월 18일: 「召見進饌所堂上」.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 일지사, 2005, 576-577쪽.
- ↑ 『憲宗戊申進饌儀軌』, 「座目」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헌종무신진찬의궤(憲宗戊申進饌儀軌)』
- 『憲宗實錄』
- 김지혜, 「세도 정치기 헌종의 궁중 연향 운용 –헌종의 어제 악장을 중심으로-」, 『한민족문화연구』 53, 한민족문화학회, 2016.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