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다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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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좁은 소매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면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갑옷이나 융복 이외에 간편한 복장의 군복이 요구되어 [[협수(狹袖)]]와 [[전복(戰服)]] 또는 [[쾌자(快子)]]라는 양식의 복식이 등장.<ref>박성실, 김향미(2002) 조선시대 기능적 馬上衣類의 실증적 고찰. 韓國服飾 20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p. 55.</ref> | ||
+ | * 동다리형 협수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의 염습의(斂襲衣) 중에 포함: "협수의 겉감은 연두색 화단(花緞)에 수구는 대홍색 운문단이며 안은 진홍색 광직(廣織)이다."<ref><文孝世子殯宮魂宮都監儀軌> “夾袖, 表連頭色花緞袖口大紅雲紋緞, 內眞紅廣織.”</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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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김병기(1818~1875) 전복.JPG|김병기(1818~1875) 전복.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문화재대관-복식․자수편> p. 1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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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궁중기록화]] |
2017년 2월 27일 (월) 22:43 판
동다리(同多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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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360px|thumb|center|]] | |
대표명칭 | 동다리(同多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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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협수(狹袖), 夾袖, 동달이, 彤多里 |
착용신분 | 왕실, 궁중 |
착용성별 | 남성 |
정의
조선후기 무관의 복식 중 군복(軍服) 구성요소의 하나.
기원
- 조선전기 융복(戎服)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군복의 소매를 좁게한 간편한 복식이 요구.
-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좁은 소매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면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갑옷이나 융복 이외에 간편한 복장의 군복이 요구되어 협수(狹袖)와 전복(戰服) 또는 쾌자(快子)라는 양식의 복식이 등장.[1]
- 동다리형 협수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의 염습의(斂襲衣) 중에 포함: "협수의 겉감은 연두색 화단(花緞)에 수구는 대홍색 운문단이며 안은 진홍색 광직(廣織)이다."[2]
착용신분과 착용상황
- 왕․문무백관들이 모두 몸을 가볍고 편하게 하기 위하여 입었던 복장으로 행행(幸行)이나 호위복,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와 국난을 당하였을 때 입었던 의복.
내용
동음이의어
협수(夾袖), 동다리는 <궁중발기>의 표현.
기본 형태
- 동다리의 형태는 직령의 깃이 달리고 소매 전체 또는 소매의 일부가 붉은색의 옷감으로 장식하고 안은 청색계열로 받침. 양옆에는 무가 달려있으며, 무 양옆과 뒷중심선이 트여 활동성을 강조. 붉은 소매부분은 화려함과 더불어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고, 좁은 소매와 트임으로 활동적이게 함.[3]
- 동다리 위에 전복(戰服)을 더하고 광대(廣大)와 전대(戰帶)를 매며, 전대에 병부를 차기도 함. 전립(戰笠)을 쓰고 등에 통개(筒箇)와 화살, 환도(還刀)를 찬 후 목화(木靴)를 신어 군복의 일습 갖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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