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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후(尹爾厚)는 [[윤선도 |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윤두서 | 공제 윤두서]]의 친부이다. 1679년 생원(生員)이 되었고, 1689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병조좌랑(兵曺佐郞), 정랑(正郞), 선혜청랑(宣惠廳郞),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을 역임했으며, 1691년 함평현감(咸平縣監)을 1년 여 지낸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에 병조랑(兵曺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무고를 당한 뒤에는 세상에 뜻이 없어 해남의 죽도(竹島)에 몇 칸 집을 마련해놓고 노년을 보냈으며, 이때 「죽도시첩(竹島詩帖)」을 남겼다.<ref>"[http://www.memoryhonam.co.kr/sub08/sub02_detail.php?DVP=1&seq=134 지암일기(支庵日記)]", 일기자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호남기록문화유산』<sup>online</sup></online></html>,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ref>
 
윤이후(尹爾厚)는 [[윤선도 |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윤두서 | 공제 윤두서]]의 친부이다. 1679년 생원(生員)이 되었고, 1689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병조좌랑(兵曺佐郞), 정랑(正郞), 선혜청랑(宣惠廳郞),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을 역임했으며, 1691년 함평현감(咸平縣監)을 1년 여 지낸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에 병조랑(兵曺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무고를 당한 뒤에는 세상에 뜻이 없어 해남의 죽도(竹島)에 몇 칸 집을 마련해놓고 노년을 보냈으며, 이때 「죽도시첩(竹島詩帖)」을 남겼다.<ref>"[http://www.memoryhonam.co.kr/sub08/sub02_detail.php?DVP=1&seq=134 지암일기(支庵日記)]", 일기자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호남기록문화유산』<sup>online</sup></online></html>,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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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후의 문집은 전하지 않고 다만 그가 8년에 걸쳐 적은 [[지암일기 | 『지암일기(支菴日記)』]]가 남아 있는데,  「逸民歌」를 비롯한 윤이후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ref>"[http://www.memoryhonam.co.kr/sub08/sub02_detail.php?DVP=1&seq=134 지암일기(支庵日記)]", 일기자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호남기록문화유산』<sup>online</sup></online></html>,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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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후의 문집은 전하지 않고 다만 그가 8년에 걸쳐 적은 [[지암일기 | 『지암일기(支菴日記)』]]가 남아 있는데,  「일민가(逸民歌)」를 비롯한 윤이후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ref>"[http://www.memoryhonam.co.kr/sub08/sub02_detail.php?DVP=1&seq=134 지암일기(支庵日記)]", 일기자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호남기록문화유산』<sup>online</sup></online></html>,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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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일 (수) 05:29 판

윤이후(尹爾厚)
대표명칭 윤이후
한자표기 尹爾厚
생몰년 1636-1699
본관 해남(海南)
지암(支庵)
재경(載卿)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직함 사간원정원, 승문원정랑
윤의미(尹義美)


정의

윤이후(尹爾厚, 1636~1699)는 조선 중기의 문인이다.

내용

생애

윤이후(尹爾厚)는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공제 윤두서의 친부이다. 1679년 생원(生員)이 되었고, 1689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병조좌랑(兵曺佐郞), 정랑(正郞), 선혜청랑(宣惠廳郞),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을 역임했으며, 1691년 함평현감(咸平縣監)을 1년 여 지낸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에 병조랑(兵曺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무고를 당한 뒤에는 세상에 뜻이 없어 해남의 죽도(竹島)에 몇 칸 집을 마련해놓고 노년을 보냈으며, 이때 「죽도시첩(竹島詩帖)」을 남겼다.[1]

저술활동

윤이후의 문집은 전하지 않고 다만 그가 8년에 걸쳐 적은 『지암일기(支菴日記)』가 남아 있는데, 「일민가(逸民歌)」를 비롯한 윤이후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지암일기 윤이후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지암일기 일민가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일민가 윤이후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윤선도 윤의미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윤의미 윤이후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윤이후 윤두서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주석

  1. "지암일기(支庵日記)", 일기자료, 『호남기록문화유산』online,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2. "지암일기(支庵日記)", 일기자료, 『호남기록문화유산』online,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