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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 | + | 파일: ② 1955년 10월-닭표 안감, <ref>SK에너지, "[http://blog.skenergy.com/822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html><online style="color:purple">『SK에너지』<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ref> |
− | 파일: | + | 파일:오승우-포항종합제철-1973s.jpg| ③ 1973년 6월 9일-첫 쇳물을 토해내다 |
파일:민족기록화_기획_기업의탄생_03.jpg| ④ 1958년 11월-[[나일론]] 직물 생산, 1959년 12월-[[폴리에스터]] 직물 생산<ref>"[https://www.sknetworks.co.kr/cyber_history.jsp#2 SK네트웍스의 발자취]", <html><online style="color:purple">『사이버역사관』<sup>online</sup></online></html>, SK네트웍스.</ref> | 파일:민족기록화_기획_기업의탄생_03.jpg| ④ 1958년 11월-[[나일론]] 직물 생산, 1959년 12월-[[폴리에스터]] 직물 생산<ref>"[https://www.sknetworks.co.kr/cyber_history.jsp#2 SK네트웍스의 발자취]", <html><online style="color:purple">『사이버역사관』<sup>online</sup></online></html>, SK네트웍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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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핵심 목표로 철강·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의 고도화를 내세웠다.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기초산업으로 철강 산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사의 포이(F. Foy) 회장을 만나 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후 미국, 프랑스,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4개국의 8개사가 참여한 한국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가 정식 발족되었고, 1967년 7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어 그해 9월 [[박태준]]이 사장으로 있던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8년 4월 1일 자본금 4억 원(정부 3억 원, 대한중석 1억 원)으로 국영기업 [[포항종합제철|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창업 인력 39명과 함께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 3층에서 창업식을 개최하였다.<ref>황은주,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pohangJecheol.do 포항제철]", 산업·경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ref> | ||
+ | # 박태준 사장은 1968년 6월 제철 건설요원들을 새벽부터 불러 모았다. 직원들 앞에서 “우리 선조들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인 만큼 건설 현장 사무소에서 나와 우향우해 모두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고 외쳤다. 1968년 제철소 건설 부지인 포항만에 자금 100만 원으로 지어졌던 현장사무소의 별칭은 롬멜하우스였다. 당시 제철소 건설 현장은 모래바람이 보안경과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는데 황무지에 모래바람을 맞으며 중장비들과 함께 들어선 현장사무소의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었다. 60평 짜리 2층 목조건물인 롬멜하우스는 낮에는 건설지휘 사령탑이었고 밤에는 숙소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직원들은 밤이면 사무실에서 책상을 침대삼아 모포 몇 장으로 함께 잠을 청했다. 우리나라 철강인들의 땀과 눈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롬멜하우스는 포스코 자산목록 제1호로 지정돼 지금도 포스코 역사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 ||
+ | #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포항제철소의 제1고로에서 1973년 6월 첫 쇳물을 토해냈다. 이어 같은 해 7월 3일 조강연산(가공되지 않고 제조된 그대로의 강철이 한 해 동안 생산된 양) 103만 톤의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었다. 포항제철소는 가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흑자로 전환하였다. 1기를 시작으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던 포항제철소는 1976년 5월 조강연산 260만 톤의 2기 제철소, 1978년 12월 조강연산 550만 톤의 3기 제철소, 1981년 2월 조강연산 850만 톤의 4기 포항제철소를 준공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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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년 6월 9일 국내 최초의 [[일관제철소]](一貫製鐵所)인 [[포항종합제철]] 제1고로에서 쇳물을 토해내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1973년 7월 3일 완공된 포항제철소의 포항 1기 설비 건설에는 연인원 581만명,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에 해당하는 1,205억원의 자금이 소요되었다. 여기에는 전체 [[대일청구권자금 | 대일 청구권]]의 23.9%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포함되어 있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706005003#csidx6b1b86df098084a9de8dd110361747c 청구권 자금 5억弗 중 포철 건설에 24% 사용]", 『서울신문』, 2015년 07월 05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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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포항제철소는 1970년대 국가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철강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제2제철소의 실수요자로 지정받아 전라남도 광양만을 매립하여 광양제철소를 세웠다. 광양제철소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종합제철소이면서 단위제철소 기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와 효율을 자랑한다. 광양제철소의 5개 고로에서는 연간 1,800만 톤의 조강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이 중 제4고로는 개수를 거쳐 2009년 내용적 5,500㎥의 초대형 고로로 재탄생하였다. 또한 2010년 1월 13일 1만 5,613톤의 쇳물을 생산하여 세계 최초로 하루 쇳물 1만 5,000톤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2011년 1월 포항제철소 4고로가 하루 1만 5,901톤의 쇳물을 생산하면서 기록이 바뀌었다. 포항제철소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의 생산조업 기술이며 기록행진은 아직 진행 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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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자원 | ||
+ | #* 조경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0217 포스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6171 포스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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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갑경, 『철강왕 박태준 - 경영이야기』, 한언, 20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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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sknetworks.co.kr/cyber_history.jsp#2 SK네트웍스의 발자취]", <html><online style="color:purple">『사이버역사관』<sup>online</sup></online></html>, SK네트웍스. | #* "[https://www.sknetworks.co.kr/cyber_history.jsp#2 SK네트웍스의 발자취]", <html><online style="color:purple">『사이버역사관』<sup>online</sup></online></html>, SK네트웍스. | ||
#* 김창근, 『[http://sk.co.kr/pdf/20130403_60_01.pdf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 #* 김창근, 『[http://sk.co.kr/pdf/20130403_60_01.pdf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 ||
− | + | #* "[http://blog.posco.com/395 포스코의 45년 히스토리, 들어보실래요?]", 포스코 소식/기업소식, <html><online style="color:purple">『hellp,posco』<sup>online</sup></online></html>, 포스코 기업 블로그. | |
+ | #* 황은주,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pohangJecheol.do 포항제철]", 산업·경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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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 | ===유용한 정보=== | ||
# 조익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260 에스케이그룹]",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조익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260 에스케이그룹]",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2017년 11월 1일 (수) 01:33 판
목차
개요
민족기록화 경제편은 1970년대 초 기간산업에 대한 경제발전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민족기록화 제작에 참여한 작가들은 전국의 대표적인 산업시설과 새마을운동을 답사하여 300호 크기의 대형작품을 제작하였다. 그 중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 기업, 포스코, LG그룹, 그리고 SK그룹의 탄생을 담은 3점의 작품들이 있다. 지금은 국내의 유수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모체가 되어 준 산업현장이 기록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내용
『오승우-포항종합제철』로 살펴보는 포스코의 탄생, 포항종합제철
-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핵심 목표로 철강·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의 고도화를 내세웠다.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기초산업으로 철강 산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사의 포이(F. Foy) 회장을 만나 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후 미국, 프랑스,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4개국의 8개사가 참여한 한국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가 정식 발족되었고, 1967년 7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어 그해 9월 박태준이 사장으로 있던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8년 4월 1일 자본금 4억 원(정부 3억 원, 대한중석 1억 원)으로 국영기업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창업 인력 39명과 함께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 3층에서 창업식을 개최하였다.[3]
- 박태준 사장은 1968년 6월 제철 건설요원들을 새벽부터 불러 모았다. 직원들 앞에서 “우리 선조들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인 만큼 건설 현장 사무소에서 나와 우향우해 모두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고 외쳤다. 1968년 제철소 건설 부지인 포항만에 자금 100만 원으로 지어졌던 현장사무소의 별칭은 롬멜하우스였다. 당시 제철소 건설 현장은 모래바람이 보안경과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는데 황무지에 모래바람을 맞으며 중장비들과 함께 들어선 현장사무소의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었다. 60평 짜리 2층 목조건물인 롬멜하우스는 낮에는 건설지휘 사령탑이었고 밤에는 숙소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직원들은 밤이면 사무실에서 책상을 침대삼아 모포 몇 장으로 함께 잠을 청했다. 우리나라 철강인들의 땀과 눈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롬멜하우스는 포스코 자산목록 제1호로 지정돼 지금도 포스코 역사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포항제철소의 제1고로에서 1973년 6월 첫 쇳물을 토해냈다. 이어 같은 해 7월 3일 조강연산(가공되지 않고 제조된 그대로의 강철이 한 해 동안 생산된 양) 103만 톤의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었다. 포항제철소는 가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흑자로 전환하였다. 1기를 시작으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던 포항제철소는 1976년 5월 조강연산 260만 톤의 2기 제철소, 1978년 12월 조강연산 550만 톤의 3기 제철소, 1981년 2월 조강연산 850만 톤의 4기 포항제철소를 준공하였다.
1973년 6월 9일 국내 최초의 일관제철소(一貫製鐵所)인 포항종합제철 제1고로에서 쇳물을 토해내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1973년 7월 3일 완공된 포항제철소의 포항 1기 설비 건설에는 연인원 581만명,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에 해당하는 1,205억원의 자금이 소요되었다. 여기에는 전체 대일 청구권의 23.9%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포함되어 있다.[4]
- 포항제철소는 1970년대 국가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철강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제2제철소의 실수요자로 지정받아 전라남도 광양만을 매립하여 광양제철소를 세웠다. 광양제철소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종합제철소이면서 단위제철소 기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와 효율을 자랑한다. 광양제철소의 5개 고로에서는 연간 1,800만 톤의 조강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이 중 제4고로는 개수를 거쳐 2009년 내용적 5,500㎥의 초대형 고로로 재탄생하였다. 또한 2010년 1월 13일 1만 5,613톤의 쇳물을 생산하여 세계 최초로 하루 쇳물 1만 5,000톤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2011년 1월 포항제철소 4고로가 하루 1만 5,901톤의 쇳물을 생산하면서 기록이 바뀌었다. 포항제철소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의 생산조업 기술이며 기록행진은 아직 진행 중이다.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서갑경, 『철강왕 박태준 - 경영이야기』, 한언, 2011.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로 설립되어 2002년 3월 15일 지금의 사명(포스코)으로 변경하였다. 국내 최초의 고로(高爐;용광로) 업체로서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 등 2개의 일관제철소를 보유하고 있다.[2]
1973년 7월 3일 조강(粗鋼) 연산 103만t 규모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를 준공한 이래 꾸준히 설비를 늘려 2009년 현재 포항제철소는 고로 5기와 PCI(미분탄취입) 설비, 용광로공법을 대체하는 친환경 제철공법인 파이넥스(FINEX) 2기 등을, 광양제철소는 고로 5기와 PCI 설비 등을 갖추고 있다. 2011년 포스코 광양제철소 하이밀 공장이 합리화 공사를 마치고 세계 최초의 연연속 열연공장을 갖추게 되어 기존 보다 30%가량 더 얇은 박판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3]
@ 작품은 1973년 6월 9일 국내 최초의 일관제철소(一貫製鐵所)인 포항종합제철 제1고로에서 쇳물을 토해내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1973년 7월 3일 완공된 포항제철소의 포항 1기 설비 건설에는 연인원 581만명,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에 해당하는 1,205억원의 자금이 소요되었다. 여기에는 전체 대일 청구권의 23.9%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포함되어 있다
『박창돈-금성사』로 살펴보는 LG그룹의 탄생, 금성사
⑥ 1964년~1965년-크레퐁과 깔깔이, 잇따른 히트상품 개발[9]
- 금성사
LG전자의 전신.
1947년 락희화학공업이 창립되었다 1958년 10월 구인회가 금성사를 설립하였다 1994년 LG그룹이 탄생했다 1995년 3월 LG전자가 탄생했다
그룹의 기틀은 1947년 락희화학 설립에서 비롯되지만, 이보다 앞선 1931년 7월 구인회(具仁會),구철회(具喆會) 형제가 경상남도 진주에서 자본금 3,800원으로 구인상회를 세운 것이 효시이다 ①②③④⑤⑥⑦
『박창돈-선경직물』으로 살펴보는 SK그룹의 탄생, 선경직물
⑥ 1964년~1965년-크레퐁과 깔깔이, 잇따른 히트상품 개발[15]
- 선경직물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SK그룹은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되었던 선경직물 공장부지를 매입한 1953년 4월 8일을 창립일로 정하고 기념해오고 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수원시 평동에 위치했던 공장부지에 돌과 자갈을 직접 나르고, 공장 내 고철을 팔아 첫 생산을 시작하였다.
- 1955년에 들어서면서 국내 직물업계는 극심한 침체국면을 맞았으나 선경직물만은 제품이 창고에 쌓일 틈도 없이 팔려나갔다. 선경직물의 인조견 '루스터'(Rooster; 장닭)가 지누시(地主; 직물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물에 담갔다가 말리는 공정)를 하지 않고도 재단이 가능한 유일한 안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10월 1일부터 12월 20일까지 창경원에서 개최된 '해방10주년기념 산업박람회'에서 '닭표' 인조견은 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그때까지 일부 수요자들 사이에서만 인기를 누려오던 닭표 안감은 부통령상 수상으로 전국적인 브랜드가 됐다.[17]
- 1958년 5월, 봉황새를 수놓은 이불감인 '봉황새 이불감'은 출시하자마자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철야작업을 하며 시장의 수요를 맞추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봉황새 이불감은 출시 3개월 만에 웃돈이 붙어 거래됐다. 선경직물의 독점상품이었던 봉황새 이불감은 한동안 예비 신부가 꼭 준비해야 할 필수 혼수감이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18]
- 1958년 11월 외제 나일론 직물과 품질이 비슷한 나일론 직물 태피터(Taffeta; 실크나 인조 섬유의 필라멘트사로 짠 가느다란 가로 골이 있는 직물)의 생산에 성공했으나, 한・일 간 외교 분쟁으로 1959년 6월 대일통상이 중단 되었고,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모든 경제활동이 일시에 위축됐다.[19] 부채 증가라는 위기 속에서 선경직물은 정전기 발생이 문제를 해결한 폴리에스터 직물을 출시하여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20]
- 1962년 4월 국내 직물업계 최초로 홍콩에 레이온 10만 마를 수출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선경직물은 1962년 일년 동안 46,000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박창돈-선경직물』은 1962년 4월 이후로 추정되는데, 작품 하단 오른쪽에 뉴욕으로 수출하기 위해 포장된 박스를 확인할 수 있다.
- 선경직물은 1964년에는 크레퐁(구불구불한 주름이 있는 직물) 생산에 성공하였고, 뒤이어 1965년에 통풍이 잘되는 '깔깔이'를 개발하였다.
- 1968년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준공, 1969년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준공으로 대한민국 원사생산 48톤 중 26%를 담당하게 되었다.
지식 관계망
중심요소
- 작품: 오승우-포항종합제철
- 작품: 박창돈-금성사
- 작품: 박창돈-선경직물
문맥요소
- Actor-인물:
- Concept-개념:
- Place-유적:
- Event-사건:
- Object-문헌:
- Object-유물:
- Object-유물:
- Object-유물: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기업의 탄생 | 오승우-포항종합제철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기업의 탄생 | 박창돈-금성사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기업의 탄생 | 박창돈-선경직물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포스코의 45년 히스토리, 들어보실래요?", 포스코 소식/기업소식,
『hellp,posco』online , 포스코 기업 블로그. - ↑ "SK네트웍스의 발자취",
『사이버역사관』online , SK네트웍스. - ↑ 황은주, "포항제철", 산업·경제,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online , 국가기록원. - ↑ "청구권 자금 5억弗 중 포철 건설에 24% 사용", 『서울신문』, 2015년 07월 05일.
- ↑ "SK네트웍스의 발자취",
『사이버역사관』online , SK네트웍스. - ↑ SK에너지,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SK에너지』online ,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 - ↑ SK에너지,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SK에너지』online ,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 - ↑ "SK네트웍스의 발자취",
『사이버역사관』online , SK네트웍스. - ↑ "SK네트웍스의 발자취",
『사이버역사관』online , SK네트웍스. - ↑ SK에너지,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SK에너지』online ,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 - ↑ "SK네트웍스의 발자취",
『사이버역사관』online , SK네트웍스. - ↑ SK에너지,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SK에너지』online ,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 - ↑ SK에너지,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SK에너지』online ,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 - ↑ "SK네트웍스의 발자취",
『사이버역사관』online , SK네트웍스. - ↑ "SK네트웍스의 발자취",
『사이버역사관』online , SK네트웍스. - ↑ SK에너지,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SK에너지』online ,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 - ↑ 김창근,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0-31쪽.
- ↑ 김창근,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2-33쪽.
- ↑ 김창근,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3쪽.
- ↑ 김창근,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4-35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SK에너지,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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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코의 45년 히스토리, 들어보실래요?", 포스코 소식/기업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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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
- 조익순, "에스케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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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 단행본
- 북모닝CEO편집팀, 『리더의 힘 거인의 탄생, 불멸의 한국리더: 최종건 회장편』, 북모닝CEO,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