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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강탈당하였던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br/> |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강탈당하였던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br/> | ||
− |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 | + |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1차 동학농민운동=== | ===1차 동학농민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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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하고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 군대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 응징, 노비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폐정개혁(弊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하였다.<br/> |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하고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 군대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 응징, 노비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폐정개혁(弊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하였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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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 |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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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31일 (화) 00:26 판
전봉준(全琫準) | |
대표명칭 | 전봉준 |
---|---|
한자표기 | 全琫準 |
생몰년 | 1855년(철종 6)-1895년(고종 33) |
본관 | 천안(天安) |
이칭 | 녹두장군 |
호 | 해몽(海夢) |
자 | 명좌(明佐) |
시대 | 근대 |
대표직함 | 동학접주 |
유형 | 농민운동가 |
목차
정의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내용
고부민란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강탈당하였던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1]
1차 동학농민운동
이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인근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였다. 고부 백산(白山)에 8000여 명이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하였다. 이어 전주를 향하여 진격하여 황토현전투(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고창·무장 등지까지 장악한 뒤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2]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하고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 군대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 응징, 노비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폐정개혁(弊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하였다.
이후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하여 감시하였다.[3]
2차 동학농민운동
그러나 근본적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음에 따라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조선에 대한 침략행위를 노골화하는 일본의 행태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서 12만의 농민군을 지휘하였으며,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 농민군과 연합하여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구국의 대일본전(對日本戰)을 시작하였다. 항쟁의 규모는 한때 중부·남부 전역을 비롯하여 함경남도와 평안남도까지 확대되었으나 근대적 무기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과 정부군의 반격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공주(公州)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하였다.[4]
패색이 짙어지자 농민군을 해산하고 순창 은신하여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 교수형을 당하였다.[5]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전봉준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가하였다 | |
김개남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가하였다 | |
손화중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가하였다 | |
손병희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가하였다 | |
전봉준 | 이하응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94년 01월 | 전봉준은 고부민란에 참가하였다 |
1894년 03월 | 전봉준은 1차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
1894년 09월 | 전봉준은 2차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
1894년 12월 | 전봉준은 체포되었다 |
1895년 | 전봉준은 처형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5.720230 | 126.806633 | 전봉준은 백산성에서 봉기하였다 |
35.671222 | 126.814583 | 전봉준은 정읍 전봉준 유적에 기거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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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피디아』online , 두산백과. - ↑ "전봉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