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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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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정조 13)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수원 화성]]의 완공과 함께 [[정조]]대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무르기 위해 건립되었다.<ref>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11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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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정조 13) 정조가 수원 팔달산 기슭에 지은 행궁이다.
  
 
=='''내용'''==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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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에 수원부 읍치를 새로 이전하고 수원 화성을 건축하면서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무르기 위해 함께 건립되었다.<ref>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년, 11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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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은 왕이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으로, 용도에 따라서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하는 행궁으로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다.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온양행궁]]은 [[세종]] 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ref>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111~112쪽.</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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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
[[화성행궁]]은 수원부의 관아 건물을 확장증축하여 조성하였었는데,성곽을 쌓는 일이 결정되면서 [[왕]]의 임시 처소인 행궁(行宮)으로 정해지고 약 570칸의 대규모 건물이 되었다.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으로, 용도에 따라서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하는 행궁으로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다.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온양행궁]]은 [[세종]] 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1795년(정조 14∼19)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에 지은 건물 150여 칸을 활용하고 420칸을 증축하여 완성되었다.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ref>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111~11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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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은 성곽 축조와 함께 수원부의 관아 건물을 확장 증축하여 지어졌다. 평소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 사용하였으므로 다른 행궁보다 현저히 커져 약 570칸의 대규모 건물이 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1795년(정조 14∼19)에 걸쳐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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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3차에 걸쳐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는 1801년(순조 1)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고 그 뒤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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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직영하는 자혜의원(慈惠醫院)이 화성행궁 터에 들어서면서부터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사업의 일환으로 1909년 전주·청주·함흥 등에 자혜병원을 세운 데 이어 1910년에 수원 등 10곳에 [[자혜의원|자혜의원(慈惠醫院)]]을 설립했다. 행궁의 대부분이 이때 철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후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 화성행궁은 자취를 잃게 되었다. 당시 유일하게 화성행궁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건물이 행궁 서남쪽 끝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낙남헌]]이다.<ref>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113~114쪽.</ref>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당이며 [[복내당]]은 내당, [[신풍루]]행궁의 정문에 해당한다. [[장락당]]은 공적인 업무를 보던 곳으로 보이는데, 방이 온돌로 된 점으로 보아 겨울철에 사용하거나 사적인 업무를 보던 곳으로 추정된다. [[낙남헌]]은 왕이 활을 시범적으로 쏘았다는 기록으로 무술과 관련하여 장병을 지휘하던 곳으로 보인다. [[화성행궁]]의 건물 배치는 정문인 [[신풍루]]에서 정당인 [[봉수당]]까지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신풍루]], [[좌선문]], [[중앙문]], [[봉수당]]으로 연결되어 있고 몇 개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거치게 되어있다.<ref>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111~113쪽.</ref>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3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는 1801년(순조 1)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고 그 뒤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0122&cid=58249&categoryId=58249 화성행궁]", 네이버 지식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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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당이며 [[복내당]]은 내당, [[신풍루]]행궁의 정문에 해당한다. [[장락당]]은 왕의 침전으로 방이 온돌로 된 점으로 보아 겨울철에도 사용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낙남헌]]은 왕이 활을 시범적으로 쏘았다는 기록으로 무술과 관련하여 장병을 지휘하던 곳으로 보인다. [[화성행궁]]의 건물 배치는 정문인 [[신풍루]]에서 정당인 [[봉수당]]까지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신풍루]], [[좌선문]], [[중앙문]], [[봉수당]]으로 연결되어 있고 몇 개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거치게 되어있다.<ref>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111~113쪽.</ref>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3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는 1801년(순조 1)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고 그 뒤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0122&cid=58249&categoryId=58249 화성행궁]", 네이버 지식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ref>
  
 
===현재===
 
===현재===
20세기 초 수원에 최초의 서양식 의료 기관인 [[자혜의원|자혜의원(慈惠醫院)]]이 [[화성행궁]] 터에 들어서면서부터 파괴되기 시작했다. 1910년 [[자혜의원]]의 증설에 필요한 돈 62,500환을 나라에서 지출하였다는 관보의 기록이 있어 병원은 이미 그 전에 지어지고 1910년에는 시설 증축이 있어 행궁의 대부분이 이때 철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후 [[자혜의원]]이 도립병원으로 바뀌었으며,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 화성행궁은 자취를 잃게 되었다. 현재 유일하게 화성행궁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건물이 행궁 서남쪽 끝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낙남헌]]이다.<ref>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113~11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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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는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1년에 수원 의료원 건물이 이전되면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이 수립되었다. 2003년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 공개되었다. 2007년 사적 제 47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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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주석'''==
 
=='''주석'''==

2017년 10월 28일 (토) 21:44 판

화성행궁(華城行宮)
문화재청(http://www.cha.go.kr/)
대표명칭 화성행궁
한자표기 華城行宮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로 11
관련인물 조선 정조


정의

1789년(정조 13) 정조가 수원 팔달산 기슭에 지은 행궁이다.

내용

정조 대에 수원부 읍치를 새로 이전하고 수원 화성을 건축하면서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무르기 위해 함께 건립되었다.[1] 행궁은 왕이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으로, 용도에 따라서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하는 행궁으로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다.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온양행궁세종 이래 역대 이 즐겨 찾던 곳이다. 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2]

역사

화성행궁은 성곽 축조와 함께 수원부의 관아 건물을 확장 증축하여 지어졌다. 평소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 사용하였으므로 다른 행궁보다 현저히 커져 약 570칸의 대규모 건물이 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1795년(정조 14∼19)에 걸쳐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3차에 걸쳐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는 1801년(순조 1)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고 그 뒤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직영하는 자혜의원(慈惠醫院)이 화성행궁 터에 들어서면서부터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사업의 일환으로 1909년 전주·청주·함흥 등에 자혜병원을 세운 데 이어 1910년에 수원 등 10곳에 자혜의원(慈惠醫院)을 설립했다. 행궁의 대부분이 이때 철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후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 화성행궁은 자취를 잃게 되었다. 당시 유일하게 화성행궁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건물이 행궁 서남쪽 끝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낙남헌이다.[3]

구성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당이며 복내당은 내당, 신풍루는 행궁의 정문에 해당한다. 장락당은 왕의 침전으로 방이 온돌로 된 점으로 보아 겨울철에도 사용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낙남헌은 왕이 활을 시범적으로 쏘았다는 기록으로 무술과 관련하여 장병을 지휘하던 곳으로 보인다. 화성행궁의 건물 배치는 정문인 신풍루에서 정당인 봉수당까지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신풍루, 좌선문, 중앙문, 봉수당으로 연결되어 있고 몇 개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거치게 되어있다.[4]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3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는 1801년(순조 1)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고 그 뒤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5]

현재

1989년에는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1년에 수원 의료원 건물이 이전되면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이 수립되었다. 2003년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 공개되었다. 2007년 사적 제 478호로 지정되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조 화성행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혜경궁 홍씨 화성행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원행을묘정리의궤 화성행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화성능행도병 화성행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795년 윤2월 11일 정조화성행궁으로 행차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281829 127.013281 화성행궁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로 11에 위치한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년, 111쪽.
  2. 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111~112쪽.
  3. 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113~114쪽.
  4. 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111~113쪽.
  5. "화성행궁",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네이버.
  6. 문화재청(http://search.cha.go.kr/).
  7. 문화재청(http://search.cha.go.kr/).
  8. 문화재청(http://search.cha.go.kr/).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김동욱, 『수원 화성』, 대원사, 1998.
  • 김동욱,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돌베개, 2002.
  • 김문식, 「조선 최대의 축제, 을묘년 정조의 수원행차」,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9쪽.
  •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 조효순, 「정조의 현륭원 행차시의 궁중의례복식고 - 「정리의궤」를 중심으로」, 『한국복식학회』 Vol.5, 한국복식학회, 1981.
  • 최진연, 『수원화성, 긴 여정』, 주류성, 2011.
  •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06.

더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