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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 이건의 동기=== | ===종택 이건의 동기=== |
2017년 10월 28일 (토) 20:12 판
의성김씨 학봉종택 (義城金氏 鶴峯宗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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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의성김씨 학봉종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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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義城金氏 鶴峯宗宅 |
영문명칭 | Hakbong Head Residence of Gim Clan of Uiseong |
유형 | 주택(한옥) |
시대 | 17세기 초엽 |
지정번호 |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112호 |
지정일 | 1995년 12월 01일 |
관련유물유적 | - 고문서 56종 261점(보물 제905호) - 제초고 및 선조 전래의 전적문서(보물 제9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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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종택(宗宅)이다. 김성일을 중시조로 하는 의성김씨 문충공파의 종손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내용
학봉종택의 자료적 가치와 의의
학봉종택은 400년이 넘는 종택의 역사에 걸맞게 학계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연구되어 오고 있다. 금계마을의 의성김씨 입향조(入鄕祖)[1]인 학봉을 비롯하여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과 같은 출중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저술한 각종 사료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제사나 민속 같은 전통생활양식까지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2]
학봉의 금계마을 입향 배경
금계마을은 『영가지(永嘉誌)』에서 옛적부터 '천년이 지나도록 패하지 않는 땅'이라고 할 만큼 길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금계마을에 입향한 문중은 흥해배씨, 경주이씨, 안동권씨, 원주변씨, 안동장씨, 의성김씨 등으로, 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에 입향하였다. 이 시기의 결혼습속에 의하면 결혼 후 남자의 거처는 처가에 귀속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학봉은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로 처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처가가 있는 금계마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봉이 입향한 16세기 말 이후로는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상속제가 일반화되면서 의성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금계마을의 중심 문중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금계마을에 남아있는 종택들은 주로 금계의 본류 주위에 터전을 잡았는데, 그 중에서도 의성김씨는 상류의 안동장씨와 하류의 원주변씨 사이에 주로 위치하며, 학봉종택이 공간적으로 마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3]
학봉의 금계 이거 정황
『학봉집』 연보에 의하면, 김성일은 1582년 부친의 3년상을 치르고 둘째형인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과 함께 백운정(白雲亭)에 머물다 안동의 서쪽 금계로 이거(移居)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이거는 공의 나이 45세 때 일로서 처부모 공양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때 비로소 김성일이 처가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거 이후 곧 의정부 사예로 환조하고 이듬해에는 나주목사로 제수를 받아 지방에 머물렀기 때문에 실제 금계에서 생활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다만 1586년 12월 나주목사에서 해임된 후 1588년 7월 조정으로 돌아갈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금계에 머물며 여러 일에 관여하고 유람도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맞이하였고, 결국 금계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쟁 중이던 1593년 진주 공관에서 병사하였다. 이처럼 김성일 대에는 종택을 건립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으며, 아들 김집(金潗, 1558-1631) 대에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4]
학봉종택의 건립 정황
학봉종택은 그의 손자인 김시추(金是樞, 1580-1640) 대에 처음으로 건립되었음을 『금계지(金溪志)』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경력공(김시추)이 당시 감여승이었던 성지(性智)로 하여금 길지를 정하도록 하였으며, 종택의 터를 행정(杏亭) 위에 잡고,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건물을 앉힌 후 '풍뢰헌(風雷軒)'과 '영모재(永慕齋)'라는 당호를 달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종택의 터를 잡았던 곳이 현재 학봉종택이 있는 곳이라고 전해질 뿐 당시 종택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이지는 않는다.[5]
두 번의 종택 이건
학봉종택은 학봉의 손자 김시추가 창건한 이후 두 번 이건하였는데, 그 중 첫 이건에 대한 기록이 『금계지』에 보인다. 여기에서 9대손인 현감공 김종수(金宗壽, 1761-1813)가 소복산 아래로 종택의 터를 옮기고 건물을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소복산 아래의 종택 터는 현재 학봉종택이 있는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으로 당시의 사랑채(현 소계서당)와 사당터 등이 남아있다. 이 기록으로는 정확한 이건 시기를 알 수 없는데, 10대손 김진화(金鎭華, 1793-1850)가 이건한 종택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건 시기는 김종수가 태어난 1761년에서 김진화가 태어난 1793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이후 김진화가 말년에 원주에서 돌아와 종택을 더 넓히고, 풍뢰헌을 집 동쪽으로 이건하였다고 했는데, 당시 풍뢰헌을 어느 곳으로 옮겼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김진화의 이력으로 보아 증축과 이건 시기는 1842년~1846년 사이로 판단된다. 종택을 이건하고 비어있던 현 종택의 위치에 11대손 김흥락을 기리기 위한 소계서당을 1934년에 건립하였으며, 1964년에는 원래 종택이 있었던 현 위치로 종택을 재이건하였다. 이때 현 학봉종택의 안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새 종택의 사랑채 부재로 다시 사용하고, 당시 사랑채 건물은 이건하지 않고 소계서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1964년의 재이건 당시 건물의 배치는 현재와는 달리 사당과 'ㅁ'자형 본채, 부엌 옆 '一'자형 부속채만 있었다고 한다.[6]
종택 이건의 동기
약 400여 년 동안 두 차례의 이건과 재이건이 이루어졌는데, 이건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문중에서는 18세기 말의 이건이 잦은 하천의 범람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문헌으로 전하는 바는 없다. 그렇지만 이건과 재이건의 전 시기에 대가 끊기는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집안의 길흉을 집터의 풍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당시의 생활풍속이 작용했을 개연성이 있다.[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의성김씨 학봉종택 | 김성일 |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 A ekc:isNamesakeOf B |
김성일 | 이황 | A는 B의 제자이다 | A ekc:hasMaster B |
의성김씨 학봉종택 | 금계마을 | A는 B에 위치한다 | A dcterms:isPartOf B |
김흥락 | 김성일 | A는 B의 후손이다 | A ekc:hasAncestor B |
영가지 | 금계마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김성일 | 금계마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김진 | 김성일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김집 | 김성일 | A는 아버지 B가 있다 | A ekc:hasFather B |
김시추 | 김집 | A는 아버지 B가 있다 | A ekc:hasFather B |
의성김씨 학봉종택 | 김시추 |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금계지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의성김씨 학봉종택 | 김종수 | A는 B에 의해 이건되었다 | A ekc:renovator B |
김진화 | 김종수 | A는 아버지 B가 있다 | A ekc:hasFather B |
풍뢰헌 | 김진화 | A는 B에 의해 이건되었다 | A ekc:renovator B |
의성김씨 학봉종택 | 김시인 | A는 B에 의해 이건되었다 | A ekc:renovator B |
학봉 행장 언해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여자초학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김주국의 편지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 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582년 | 김성일이 금계마을에 입향하였다. |
17세기 초엽 | 김시추가 의성김씨 학봉종택을 건립하였다. |
1761년-1793년 사이 | 김종수가 의성김씨 학봉종택을 이건하였다. |
1842년-1846년 사이 | 김진화가 '풍뢰헌'을 이건하였다. |
1964년 | 김시인이 의성김씨 학봉종택을 이건하였다. |
공간 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609771 | 128.669643 | 의성김씨 학봉종택은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금계마을)에 있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의성김씨 학봉 종택(게시일: 2012.10.10.)
- YTN 뉴스 : 전통예법으로 뿌리 지키는 종갓집(게시일: 2015.02.19.)
주석
- ↑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이나 조상. 김택규, "입향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입향조",『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7쪽.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8-9쪽.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9-10쪽.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10쪽.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10-12쪽.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12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김덕현, 『안동 선비마을, 열두 검제』(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 김영조,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얼레빗, 2015)
- 윤천근, 『안동의 종가』(지식산업사, 2001)
- 이연자, 『천년의 전통과 맥을 이어가는 명문 종가 이야기』(컬처라인, 2004)
- 이해영, 『의리와 충절의 400년, 안동 학봉 김성일 종가』(예문서원, 2011)
-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한국간찰자료선집 12 : 안동 금계 의성김씨 학봉(김성일)종택편』(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 논문
- 함금자, 「종가박물관의 역할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정책·산업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 연구보고서
- 『지방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경상북도, 1994.
-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