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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과 집안에 대해서 ===
 
===[[최명길]]과 집안에 대해서 ===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또는  창랑(滄浪)이다. [[최업|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또는  창랑(滄浪)이다. [[최업|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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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최명길]]의 [[광해군]]시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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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의 [[조선 인조|인조]]시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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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김자점]], [[심기원]] 등 유생들과 함께 홍제원(弘濟院) 터에서 모여 반정에 참여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1503012_005 반정이 일어나자 도망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1623) 3월 12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리하여 이틀 후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며, 10월에는 녹훈을 받아 1등 정사 공신이 된어 완성부원군에 봉해졌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10118_003 정사훈(靖社勳)을 감정토록 명하여 1·2·3등 53명을 녹훈하다]",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1623) 윤10월 18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 후에는 이조 참판까지 벼슬이 올라갔으며,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녹훈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최명길]]은 총독부사(摠督副使)가 되어 관군과 합류하여 [[이괄]]과 맞선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12_002 체찰 부사 이시발과 총독 부사 최명길 등이 이괄이 도주했다고 보고하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 2월 12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이후 [[이괄]]이 패배하여 반란이 막을 내리자, [[조선 인조|인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18_002 전의현에 머물다. 총독 부사 최명길이 길에서 맞이하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 2월 18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 이 일어나자 [[조선 인조|인조]]를 따라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강화도의 수비도 불완전 하였고, 많은 대신들이 강화(講和[)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명길]]은 현실적인 판단 한 결과 더이상 전쟁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조선 인조|인조]]를 설득하여 후금과 강화를 맺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01029_002 강을 건너 행궁에 도착하고, 청 사신이 화친의 뜻을 보이다]",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1627) 1월 29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리고 후금 진영에 들어가 전쟁에서 진 조선의 불리한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외교로 이끌가려고 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나라 군대가 매우 빨리 한양까지 진격 하였고, 이에 [[조선 인조|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최명길]]은 추격하는 청나라 군대의 속도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청 진영으로 가서 강화 협상을 하였다. 그 결과 [[조선 인조|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 할 있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4_003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1636) 12월 14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정묘호란]] 때 처럼 상당수의 신하들이 화친을 거부했는데, [[최명길]]은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 자체가 현실성이 없고 대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결국 청나라와 강화를 맺게 된다.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 좌의정을 걸쳐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전란 이후 국토과 황폐화 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는데 [[최명길]]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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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김자점]], [[심기원]] 등 유생들과 함께 홍제원(弘濟院) 터에서 모여 반정에 참여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1503012_005 반정이 일어나자 도망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1623) 3월 12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리하여 이틀 후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며, 10월에는 녹훈을 받아 1등 정사 공신이 된어 완성부원군에 봉해졌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10118_003 정사훈(靖社勳)을 감정토록 명하여 1·2·3등 53명을 녹훈하다]",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1623) 윤10월 18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 후에는 이조 참판까지 벼슬이 올라갔으며,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녹훈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최명길]]은 총독부사(摠督副使)가 되어 관군과 합류하여 [[이괄]]과 맞선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12_002 체찰 부사 이시발과 총독 부사 최명길 등이 이괄이 도주했다고 보고하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 2월 12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이후 [[이괄]]이 패배하여 반란이 막을 내리자, [[조선 인조|인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18_002 전의현에 머물다. 총독 부사 최명길이 길에서 맞이하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 2월 18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 이 일어나자 [[조선 인조|인조]]를 따라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강화도의 수비도 불완전 하였고, 많은 대신들이 강화(講和[)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명길]]은 현실적인 판단 한 결과 더이상 전쟁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조선 인조|인조]]를 설득하여 후금과 강화를 맺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01029_002 강을 건너 행궁에 도착하고, 청 사신이 화친의 뜻을 보이다]",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1627) 1월 29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리고 후금 진영에 들어가 전쟁에서 진 조선의 불리한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외교로 이끌가려고 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나라 군대가 매우 빨리 한양까지 진격 하였고, 이에 [[조선 인조|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최명길]]은 추격하는 청나라 군대의 속도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청 진영으로 가서 강화 협상을 하였다. 그 결과 [[조선 인조|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 할 있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4_003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1636) 12월 14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정묘호란]] 때 처럼 상당수의 신하들이 화친을 거부했는데, [[최명길]]은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 자체가 현실성이 없고 대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결국 청나라와 강화를 맺게 된다.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 좌의정을 걸쳐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전란 이후 국토과 황폐화 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는데 [[최명길]]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그리고 청나라와 외교를 전담하여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데려왔으며 복잡한 외교 문제 및 세폐 수량을 줄여서 조선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였다. 1642년(인조 20)경 임경업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명나라와 결탁하여 청나라를 공격하려 했던 사실이 들어나면서 [[최명길]]도 심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1645년(인조 23) 약 3년간 심양에서 같혀 지내다가 고국으로 돌아왔고다시 [[조선 인조|인조]]를 보필하다가 1647년(인조 25)에 죽었다.<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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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청나라와 외교를 전담하여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데려왔으며 복잡한 외교 문제 및 세폐 수량을 줄여서 조선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였다. 1642년(인조 20)경 임경업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명나라와 결탁하여 청나라를 공격하려 했던 사실이 들어나면서 [[최명길]]도 심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1645년(인조 23) 약 3년간 심양에서 같혀 지내다가 고국으로 돌아왔고다시 [[조선 인조|인조]]를 보필하다가 1647년(인조 25)에 죽었다.<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성리학과 문장 실력이 뛰어나며 글씨체도 뛰어났고 양명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대표 저서로는  [[지천집]], [[지천주차|지천주차(遲川奏箚)]]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성리학과 문장 실력이 뛰어나며 글씨체도 뛰어났고 양명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대표 저서로는  [[지천집]], [[지천주차|지천주차(遲川奏箚)]]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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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15권, 온라인 참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인조실록』 15권, 온라인 참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인조실록』 33권, 온라인 참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인조실록』 33권, 온라인 참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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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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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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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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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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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7일 (금) 20:15 판

최명길(崔鳴吉)
겸주, 최명길,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최명길
한자표기 崔鳴吉
생몰년 1586년-1647년
본관 전주
시대 조선시대
국적 조선
대표저서 [지천집]], 지천주차
대표직함 우의정
최기남
유영립의 딸
상훈 정사공신
성격 문인
유형 인물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내용

최명길과 집안에 대해서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또는 창랑(滄浪)이다.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1]

최명길광해군시기 활동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같이 학문을 배웠다. 1605년(선조 38)에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2] 1613년(광해 5)에는 병조 좌랑 자리에 올랐으나 [3]불과 1년만에 국내 정치 문제와 아울러 명나라 사신 접촉 금지 문제가 생겨 관직을 삭탈 당한다. [4] 관직에서 쫓겨난 이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수년간 복상(服喪)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시기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인목대비의 유폐 등 광해군의 치세가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최명길인조시기 활동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김자점, 심기원 등 유생들과 함께 홍제원(弘濟院) 터에서 모여 반정에 참여하였다.[5] 그리하여 이틀 후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며, 10월에는 녹훈을 받아 1등 정사 공신이 된어 완성부원군에 봉해졌다.[6] 그 후에는 이조 참판까지 벼슬이 올라갔으며,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녹훈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최명길은 총독부사(摠督副使)가 되어 관군과 합류하여 이괄과 맞선다.[7] 이후 이괄이 패배하여 반란이 막을 내리자, 인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8]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 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강화도의 수비도 불완전 하였고, 많은 대신들이 강화(講和[)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명길은 현실적인 판단 한 결과 더이상 전쟁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인조를 설득하여 후금과 강화를 맺었다.[9] 그리고 후금 진영에 들어가 전쟁에서 진 조선의 불리한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외교로 이끌가려고 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나라 군대가 매우 빨리 한양까지 진격 하였고, 이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최명길은 추격하는 청나라 군대의 속도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청 진영으로 가서 강화 협상을 하였다. 그 결과 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 할 있었다.[10] 정묘호란 때 처럼 상당수의 신하들이 화친을 거부했는데, 최명길은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 자체가 현실성이 없고 대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결국 청나라와 강화를 맺게 된다.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 좌의정을 걸쳐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전란 이후 국토과 황폐화 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는데 최명길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11] 그리고 청나라와 외교를 전담하여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데려왔으며 복잡한 외교 문제 및 세폐 수량을 줄여서 조선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였다. 1642년(인조 20)경 임경업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명나라와 결탁하여 청나라를 공격하려 했던 사실이 들어나면서 최명길도 심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1645년(인조 23) 약 3년간 심양에서 같혀 지내다가 고국으로 돌아왔고다시 인조를 보필하다가 1647년(인조 25)에 죽었다.[12]

성리학과 문장 실력이 뛰어나며 글씨체도 뛰어났고 양명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대표 저서로는 지천집, 지천주차(遲川奏箚)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최기남 최명길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유영립의 딸 최명길 A는 B의 어머니이다 A ekc:hasSon B
유영립 유영립의 딸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이항복 최명길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이항복 이시백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인조반정 김자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인조반정 심기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인조반정 이괄의 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인조반정 최명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인조반정 이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괄의 난 최명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괄의 난 이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괄의 난 이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인조반정 조선 인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묘호란 최명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병자호란 최명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지천집 최명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지천주차 최명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화포식언해 이서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화포식언해 화포식언해 최명길 발문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화포식언해 최명길 발문 최명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마경초집언해 이서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지천집 마경발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마경 이서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A dcterms:publisher B
마경발 마경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마경발 이서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23년 최명길인조반정에 참여하였다
1624년 최명길이괄의 난조선 인조의 인정을 받았다
1627년 최명길정묘호란시기 청나라와 화친을 하였다
1636년 최명길병자호란때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주석

  1. 이겸주, "최명길",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대제학 유근 등에게 생원 최명길 등 2백 명을 시취하게 하다", 『선조실록』 184권, 선조 38년(1605) 2월 14일,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정온을 필선, 박재를 사서로, 조정립을 정언, 최명길을 병조 좌랑으로 삼다", 『광해군일기(정초본)』 71권, 광해 5년(1613) 10월 1일,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병조 좌랑 최명길·선전관 윤우가 잡혀와 하옥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74권, 광해 6년(1614) 1월 14일,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반정이 일어나자 도망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1623) 3월 12일,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정사훈(靖社勳)을 감정토록 명하여 1·2·3등 53명을 녹훈하다",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1623) 윤10월 18일,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체찰 부사 이시발과 총독 부사 최명길 등이 이괄이 도주했다고 보고하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 2월 12일,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8. "전의현에 머물다. 총독 부사 최명길이 길에서 맞이하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 2월 18일,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9. "강을 건너 행궁에 도착하고, 청 사신이 화친의 뜻을 보이다",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1627) 1월 29일,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0.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1636) 12월 14일,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1. 이겸주, "최명길",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이겸주, "최명길",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출처/전거

  • 사료
    • 『선조실록』 184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광해군일기(정초본)』 71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광해군일기(중초본)』 74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인조실록』 3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인조실록』 4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인조실록』 4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인조실록』 15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인조실록』 33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유용한 정보

  • 이겸주, "최명길",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