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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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의 높이는 2.51m, 무릎 너비 1.97m이다.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제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다.<ref>"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2497&cid=40942&categoryId=33380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 좌상의 높이는 2.51m, 무릎 너비 1.97m이다.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제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다.<ref>"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2497&cid=40942&categoryId=33380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 ||
− |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는 철불과 [[비로자나불]]은 [[선종|선종(禪宗)]] 사찰과 밀접한 관계가 | + |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는 철불과 [[비로자나불]]은 [[선종|선종(禪宗)]] 사찰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ref>강우방, 곽동석, 민병찬, ''한국 美의 재발견 - 불교 조각 II'', 솔출판사, 2005, 114쪽.</ref> |
+ | 그 중에서도 이 보림사의 철조비로자나불은 왼쪽 팔 부분에 명문이 있어 조성 연대와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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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858년에 [[김언경|김수종]]이 왕의 허락을 받아 불상을 조성했다는 이 명문을 통해, 신라 하대(下代)에는 중앙의 지원 없이 지방 유지가 개인 재산을 들여 불상을 조성할 정도로 선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ref>강우방, 곽동석, 민병찬, ''한국 美의 재발견 - 불교 조각 II'', 솔출판사, 2005, 114쪽.</ref> 또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는 860년 부수(副守) [[김언경|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
+ | {{Blockquote|선제(宣帝) 14년(860, 헌안왕 4년) 2월에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일찍이 제자의 예를 표하며 선사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청봉(淸俸)을 덜고 개인의 재산을 내어 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절을 장엄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10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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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의 두 기록에서 나타나는 차이 때문에, 불상을 만든 것은 김수종인데 후임자인 김언경이 그 공을 가로챘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활동년대와 한 일의 내용으로 보아 김수종과 김언경은 같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기존의 정설이다. 불상과 비문에 적힌 조성년대가 각각 다른 것은, 헌안왕 2년(858)은 철불을 부어 만들 거푸집을 만들면서 새긴 연도이고 이 거푸집을 만드는 데 1년이 걸렸으며 철불을 완성해서 봉안한 것이 헌안왕 4년(860)이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림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돌베개, 201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201&cid=42840&categoryId=42849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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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는 -가 봉헌하였다 || [[김언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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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 ||
+ |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38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조상기",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 ||
=='''주석'''== | =='''주석'''== |
2017년 2월 23일 (목) 02:23 판
정의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의 주불.
개요
좌상의 높이는 2.51m, 무릎 너비 1.97m이다.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제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다.[1]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는 철불과 비로자나불은 선종(禪宗) 사찰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2] 그 중에서도 이 보림사의 철조비로자나불은 왼쪽 팔 부분에 명문이 있어 조성 연대와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 후 1808년이다. 이때는 정왕 즉위 3년이다. 대중 12년(헌안왕 2, 858) 무인 7월 17일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이 진주하여, 정왕(情王)은 8월 22일 칙령을 내렸는데 ▨ 몸소 지으시고도 피곤함을 알지 못하셨다. | ||
출처: |
858년에 김수종이 왕의 허락을 받아 불상을 조성했다는 이 명문을 통해, 신라 하대(下代)에는 중앙의 지원 없이 지방 유지가 개인 재산을 들여 불상을 조성할 정도로 선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3] 또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는 860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선제(宣帝) 14년(860, 헌안왕 4년) 2월에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일찍이 제자의 예를 표하며 선사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청봉(淸俸)을 덜고 개인의 재산을 내어 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절을 장엄했다.[4] | ||
출처: |
위의 두 기록에서 나타나는 차이 때문에, 불상을 만든 것은 김수종인데 후임자인 김언경이 그 공을 가로챘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활동년대와 한 일의 내용으로 보아 김수종과 김언경은 같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기존의 정설이다. 불상과 비문에 적힌 조성년대가 각각 다른 것은, 헌안왕 2년(858)은 철불을 부어 만들 거푸집을 만들면서 새긴 연도이고 이 거푸집을 만드는 데 1년이 걸렸으며 철불을 완성해서 봉안한 것이 헌안왕 4년(860)이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5]
갤러리
- BorimsaVairocana side.jpg
옆에서 본 모습
- BorimsaVairocana head.jpg
불두
- BorimsaVairocana hand.jpg
지권인
- BorimsaVairocana inscription.jpg
비로자나불좌상 조상기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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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는 -에 있다 || 장흥 보림사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는 -와 관련있다 || 비로자나불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는 -가 봉헌하였다 || 김언경 참고문헌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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