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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조선 경종|경종]]은 성격이 온유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정언 [[이정소|이정소(李廷熽)]]의 상소를 시발로,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조태채(趙泰采)]] 등이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년 8월에 [[조선 영조|영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론]]의 행사직(行司直) [[유봉휘|유봉휘(柳鳳輝)]]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우의정 [[조태구|조태구(趙泰耉)]]도 그를 비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 달 뒤인 10월에 집의 [[조성복|조성복(趙聖復)]]의 상소로 세제청정(世弟聽政)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경종|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간의 논쟁도 치열하였다. 이 때에 [[소론]]에 대한 [[조선 경종|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1721년 12월에 [[소론]]의 과격파인 사직(司直) [[김일경|김일경(金一鏡)]]을 우두머리로 한 7인이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ref>오갑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13 신임사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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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조선 경종|경종]]은 성격이 온유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정언 [[이정소|이정소(李廷熽)]]의 상소를 시발로,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조태채(趙泰采)]] 등이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년 8월에 [[조선 영조|영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론]]의 행사직(行司直) [[유봉휘|유봉휘(柳鳳輝)]]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우의정 [[조태구|조태구(趙泰耉)]]도 그를 비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 달 뒤인 10월에 집의 [[조성복|조성복(趙聖復)]]의 상소로 세제청정(世弟聽政)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경종|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간의 논쟁도 치열하였다. 이 때에 [[소론]]에 대한 [[조선 경종|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1721년 12월에 [[소론]]의 과격파인 사직(司直) [[김일경|김일경(金一鏡)]]을 우두머리로 한 7인이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ref>오갑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13 신임사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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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경종|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세제인 [[조선 영조|영조]]가 즉위하자,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일경]]과 [[목호룡]]은 처단되었고, 임인옥안(壬寅獄案)은 번안(飜案 : 안건을 뒤집어 놓음)되었다. 요컨대, [[신임사화]]는 [[노론]]과 [[소론]]간에 각각 [[조선 경종|경종]] 보호와 [[조선 영조|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결한 옥사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인(黨人)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自黨)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조선 영조|영조]]의 탕평책도 그 자신이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졌다.<ref>오갑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13 신임사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그러나 [[조선 경종|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세제인 [[조선 영조|영조]]가 즉위하자,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일경]]과 [[목호룡]]은 처단되었고, 임인옥안(壬寅獄案)은 번안(飜案 : 안건을 뒤집어 놓음)되었다. 요컨대, [[신임사화]]는 [[노론]]과 [[소론]]간에 각각 [[조선 경종|경종]] 보호와 [[조선 영조|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결한 옥사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인(黨人)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自黨)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조선 영조|영조]]의 탕평책도 그 자신이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졌다.<ref>오갑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13 신임사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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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사화]] 명칭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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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1721)과 임인년(壬寅年, 1722)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 한다. 임인년에 주로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임인옥]]’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逆謀)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이다.<ref>오갑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13 신임사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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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1721)과 임인년(壬寅年, 1722)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 한다. 임인년에 주로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임인옥]]'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逆謀)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이다.<ref>오갑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13 신임사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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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조선 경종|경종]]은 성격이 온유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정언 [[이정소|이정소(李廷熽)]]의 상소를 시발로,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조태채(趙泰采)]] 등이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년 8월에 [[조선 영조|영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론]]의 행사직(行司直) [[유봉휘|유봉휘(柳鳳輝)]]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우의정 [[조태구|조태구(趙泰耉)]]도 그를 비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 달 뒤인 10월에 집의 [[조성복|조성복(趙聖復)]]의 상소로 세제청정(世弟聽政)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경종|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간의 논쟁도 치열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경종|경종]]의 질환을 이유로 하여 [[조선 경종|경종]] 즉위년부터 세제 책봉과 세제 대리청정 문제를 서둘렀으므로 그것을 쟁점으로 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이 때에 [[소론]]에 대한 [[조선 경종|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1721년 12월에 [[소론]]의 과격파인 사직(司直) [[김일경|김일경(金一鏡)]]을 우두머리로 한 7인이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ref>오갑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13 신임사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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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조선 경종|경종]]은 성격이 온유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정언 [[이정소|이정소(李廷熽)]]의 상소를 시발로,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조태채(趙泰采)]] 등이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년 8월에 [[조선 영조|영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론]]의 행사직(行司直) [[유봉휘|유봉휘(柳鳳輝)]]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우의정 [[조태구|조태구(趙泰耉)]]도 그를 비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 달 뒤인 10월에 집의 [[조성복|조성복(趙聖復)]]의 상소로 세제청정(世弟聽政)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경종|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간의 논쟁도 치열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경종|경종]]의 질환을 이유로 하여 [[조선 경종|경종]] 즉위년부터 세제 책봉과 세제 대리청정 문제를 서둘렀으므로 그것을 쟁점으로 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이 때에 [[소론]]에 대한 [[조선 경종|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1721년 12월에 [[소론]]의 과격파인 사직(司直) [[김일경|김일경(金一鏡)]]을 우두머리로 한 7인이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ref>오갑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13 신임사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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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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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욱, 「『樸素村話』소재 당쟁이야기의 진술방식과 지향의식 (신임사화 관련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Vol 23, 2004, 13-43쪽.  
 
**조선욱, 「『樸素村話』소재 당쟁이야기의 진술방식과 지향의식 (신임사화 관련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Vol 23, 2004, 13-43쪽.  
 
**오함녕, 「『경종실록』의 편찬과 수정」, 『民族文化』, Vol 42, 2013, 183-217쪽.  
 
**오함녕, 「『경종실록』의 편찬과 수정」, 『民族文化』, Vol 42, 2013, 183-217쪽.  
 
  
 
===유용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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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갑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13 신임사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오갑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13 신임사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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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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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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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7일 (화) 23:00 판

신임사화(辛壬士禍)
대표명칭 신임사화
한자표기 辛壬士禍
이칭 신임사옥 임인옥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721년-1722년
관련인물 영조 경종 이이명 김창집
관련단체 노론 소론



정의

1721년(경종 1)부터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사류(士類)들의 참변.

내용

신임사화의 배경

숙종의 두 아들 세자영잉군를 둘러싼 노론소론의 정치적 싸움

숙종 말년에 소론은 세자인 균(昀 : 뒤의 경종)을 지지했으며, 노론은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을 지지하였다. 한편 1716년(숙종 42) 병신처분(丙申處分 : 소론을 배척한 처분)으로 노론 정권이 실권을 잡은 이듬해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소위 정유독대(丁酉獨對 : 숙종 43년 숙종이 세자교체문제를 이이명과 단독 대담을 통해 논의한 일)를 하였다. 이로써 소론경종 보호의 명분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반면 노론영잉군 추대의 의리로 맞서 이후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1]

경종의 즉위와 영잉군의 왕세제 책봉 및 대리청정 문제

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경종은 성격이 온유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정언 이정소(李廷熽)의 상소를 시발로,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이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년 8월에 영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론의 행사직(行司直) 유봉휘(柳鳳輝)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도 그를 비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 달 뒤인 10월에 집의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로 세제청정(世弟聽政)을 요구하였다. 이에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소론간의 논쟁도 치열하였다. 이 때에 소론에 대한 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1721년 12월에 소론의 과격파인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을 우두머리로 한 7인이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2]

소론의 공격 상소로 노론 정권을 잃다

이 상소로 인해 병신처분 이래 구축된 노론의 권력 기반은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換局)이 단행되었다. 이에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珍島郡)에, 이건명은 나로도(羅老島)에 각각 안치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여러 노론들도 삭직, 문외출송(門外黜送) 또는 정배되었다. 한편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崔奎瑞), 우의정에 최석항(崔錫恒)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소론 측에서도 김일경의 인물됨을 경계해 노론 숙청에 온건적 입장을 취하는 조태구·최석항 일파는 완소(緩少), 강경론자인 김일경 일파를 준소(峻少)라 하였다.[3]

목호룡의 고변과 대규모 옥사가 일어나다

1722년 3월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격한 처단을 요구하고 있을 때에 목호룡(睦虎龍)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소위 삼급수설(三急手說), 즉 대급수(大急手 : 칼로써 살해)·소급수(小急手 : 약으로 살해)·평지수(平地手 : 모해해 폐출함.)를 들어 고변하였다. 이 음모에 관련자들은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기지(李器之)·이희지(李喜之)·심상길(沈尙吉)·홍의인(洪義人)·김민택(金民澤)·백망(白望)·김성행(金省行)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자질(子姪)과 그들의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했다는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드러난 것이다. 이 고변에 의해 국청(鞫廳)이 설치되고 역모에 관련된 자들이 잡혀서 처단되는 대옥사가 일어났다. 이 옥사에서 노론 4대신은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을 복관시키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 등을 숙종묘(肅宗廟)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東城君)의 훈작(勳爵)이 수여되었다.[4]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즉위 그리고 노론 복수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자,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일경목호룡은 처단되었고, 임인옥안(壬寅獄案)은 번안(飜案 : 안건을 뒤집어 놓음)되었다. 요컨대, 신임사화노론소론간에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결한 옥사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인(黨人)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自黨)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영조의 탕평책도 그 자신이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졌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임사화 경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신임사화 영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신임사화 노론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신임사화 소론 A는 B와 관련이 있다
숙종 장희빈 A는 B의 남편이다
숙종 경종 A는 B의 아버지다
장희빈 경종 A는 B의 남편이다
노론 이이명 A는 B를 포함한다
노론 김창집 A는 B를 포함한다
노론 조태제 A는 B를 포함한다
소론 목호룡 A는 B를 포함한다
소론 김일경 A는 B를 포함한다
소론 조태구 A는 B를 포함한다
삼급수설 목호룡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삼급수설 김일경 A는 B와 관련이 있다
소훈이씨제문 신임사화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721년-1722년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1722년 3월 목호룡이 고변한 삼급수설이 일어났다

공간정보

주석

  1. 오갑균, "신임사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오갑균, "신임사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오갑균, "신임사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오갑균, "신임사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오갑균, "신임사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조선욱, 「『樸素村話』소재 당쟁이야기의 진술방식과 지향의식 (신임사화 관련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Vol 23, 2004, 13-43쪽.
    • 오함녕, 「『경종실록』의 편찬과 수정」, 『民族文化』, Vol 42, 2013, 183-217쪽.

유용한 정보

오갑균, "신임사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