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향선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9번째 줄: | 9번째 줄: | ||
黃香 江夏人 年九歲失母 思慕憔悴 殆不免喪 鄕人稱其孝 獨養其父 躬執勤苦 夏則扇枕席 冬則以身 | 黃香 江夏人 年九歲失母 思慕憔悴 殆不免喪 鄕人稱其孝 獨養其父 躬執勤苦 夏則扇枕席 冬則以身 | ||
溫被 太守表而異之<ref>表而異之 : 《二十四孝》의 현대주석 “表:旌表也。 ……江夏的太守劉護,非常讚美黃香的孝行,便奏請朝廷旌揚他的孝行” /// *【表】(2)又如:旌表(立石碑、扁額以頌揚功德); 表章(顯揚;宣揚;古代臣子上君王的奏章); 表顯(顯揚); 表式(表彰)</ref> 自是名聞於世 後官遷 至尙書令 至子及孫皆貴顯 | 溫被 太守表而異之<ref>表而異之 : 《二十四孝》의 현대주석 “表:旌表也。 ……江夏的太守劉護,非常讚美黃香的孝行,便奏請朝廷旌揚他的孝行” /// *【表】(2)又如:旌表(立石碑、扁額以頌揚功德); 表章(顯揚;宣揚;古代臣子上君王的奏章); 表顯(顯揚); 表式(表彰)</ref> 自是名聞於世 後官遷 至尙書令 至子及孫皆貴顯 | ||
− | |||
|원문2=황항은 한나라 강하 사람이니 나히 구셰에 어미 일코 모고 쵸여 거의 죽게 되니 향즁 사이 그 효셩을 일더라 홀로 그 아비 봉양 몸소 근고믈 잡아 여이면 볘개와 자리에 부딜고 겨이면 몸으로 니블을 사게 니 나라 주문<ref>주문 : 奏文. 임금에게 아뢰는 글</ref>여 일로브터 셰샹에 일홈난디라 후에 벼이 여려 번 올마 상셔령에 니고 아과 손 다 귀히 되인라 | |원문2=황항은 한나라 강하 사람이니 나히 구셰에 어미 일코 모고 쵸여 거의 죽게 되니 향즁 사이 그 효셩을 일더라 홀로 그 아비 봉양 몸소 근고믈 잡아 여이면 볘개와 자리에 부딜고 겨이면 몸으로 니블을 사게 니 나라 주문<ref>주문 : 奏文. 임금에게 아뢰는 글</ref>여 일로브터 셰샹에 일홈난디라 후에 벼이 여려 번 올마 상셔령에 니고 아과 손 다 귀히 되인라 | ||
− | |||
|해석문1= | |해석문1= | ||
|해석문2=황향은 한나라 강하 사람이다. 나이 구세에 어머니를 잃고 사모하고 초췌하여 거의 죽게 되니, 마을사람이 그 효성을 일컬었다. 홀로 그 아버지를 봉양할 때에 몸소 수고로운 일을 맡아 여름이면 베개와 자리에 부채질하고 겨울이면 몸으로써 이불을 따스하게 하였다. 태수가 나라에 아뢰어 이로부터 세상에 이름이 났다. 후에 벼슬이 여러 번 옮겨 상서령에 이르고, 아들과 손자가 다 귀하게 되었다. | |해석문2=황향은 한나라 강하 사람이다. 나이 구세에 어머니를 잃고 사모하고 초췌하여 거의 죽게 되니, 마을사람이 그 효성을 일컬었다. 홀로 그 아버지를 봉양할 때에 몸소 수고로운 일을 맡아 여름이면 베개와 자리에 부채질하고 겨울이면 몸으로써 이불을 따스하게 하였다. 태수가 나라에 아뢰어 이로부터 세상에 이름이 났다. 후에 벼슬이 여러 번 옮겨 상서령에 이르고, 아들과 손자가 다 귀하게 되었다. |
2017년 10월 10일 (화) 01:59 판
본 기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6년에 개최한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2016.6.29~12.31)'의 도록 및 2016~2017년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중 황향선침 관련 '발표내용'을 참고 활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원문 중 옛 한글의 경우 웹브라우저 및 시스템의 문자세트(character set) 표현상 한계로 인해 표시가 불완전할 수 있으며, 각 내용상의 사소한 교정은 별도의 언급 없이 적용하였습니다. |
원문과 해석문
원문 | 해석문 |
---|---|
黃香扇枕 漢
黃香 江夏人 年九歲失母 思慕憔悴 殆不免喪 鄕人稱其孝 獨養其父 躬執勤苦 夏則扇枕席 冬則以身 溫被 太守表而異之[1] 自是名聞於世 後官遷 至尙書令 至子及孫皆貴顯</td> | </td>
</tr> |
황항은 한나라 강하 사람이니 나히 구셰에 어미 일코 모고 쵸여 거의 죽게 되니 향즁 사이 그 효셩을 일더라 홀로 그 아비 봉양 몸소 근고믈 잡아 여이면 볘개와 자리에 부딜고 겨이면 몸으로 니블을 사게 니 나라 주문[2]여 일로브터 셰샹에 일홈난디라 후에 벼이 여려 번 올마 상셔령에 니고 아과 손 다 귀히 되인라</td> | 황향은 한나라 강하 사람이다. 나이 구세에 어머니를 잃고 사모하고 초췌하여 거의 죽게 되니, 마을사람이 그 효성을 일컬었다. 홀로 그 아버지를 봉양할 때에 몸소 수고로운 일을 맡아 여름이면 베개와 자리에 부채질하고 겨울이면 몸으로써 이불을 따스하게 하였다. 태수가 나라에 아뢰어 이로부터 세상에 이름이 났다. 후에 벼슬이 여러 번 옮겨 상서령에 이르고, 아들과 손자가 다 귀하게 되었다.</td>
</t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