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정의) |
(→내용) |
||
34번째 줄: | 34번째 줄: | ||
=='''내용'''== | =='''내용'''== | ||
− | === | + | ===가계와 탄생=== |
− |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진(李瑱)이다.<ref>민백</ref> | + |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진(李瑱)이다. 아버지 이진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비로소 가문의 이름이 높아졌다.<ref>민백</ref> |
+ | ===성장 과정=== | ||
+ |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하여,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1301년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ref>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현 [李齊賢]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ref> 이제현은 문과시험에 합격할 당시에 밀직사사 권영의 문하에 있었는데, 권영이 그의 학문과 뜻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장인인 권영의 가문은 이제현의 집안과 비교해 볼 때 세력이 막강했다. 처가의 배경은 그의 정치행로 및 학문에 큰 배경이 되었다. <ref>[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현 [李齊賢] - 원 지배기에 고려를 지킨 정치가 (인물한국사)</ref> | ||
+ | |||
+ | ===원나라 생활=== | ||
+ | 1314년(충숙왕 1) 상왕(上王)인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원나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겼다. 이제현의 원나라 생활과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로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할 때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이제현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ref>민백</ref> | ||
+ | |||
+ | |||
+ | ===귀국 후 활동=== | ||
+ |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ref>[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현 [李齊賢] (두산백과)</ref> | ||
+ | |||
+ |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되었다. 당시 문란하여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하여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 뒷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네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ref>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현 [李齊賢]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ref> | ||
+ | |||
+ | 1367년(공민왕 16)에 병으로 세상을 뜨니 향년 81세였다.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우봉현 도리촌 선영에 모셔졌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2539&cid=59015&categoryId=59015 이제현]", 인물한국사</ref> | ||
+ | |||
+ | ===학문 및 저술 활동=== | ||
+ | |||
+ | |||
+ | ===평가=== | ||
=='''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7년 10월 7일 (토) 17:35 판
이제현(李齊賢) | |
대표명칭 | 이제현 |
---|---|
한자표기 | 李齊賢 |
생몰년 | 1287년(충렬왕 14)-1367년(공민왕 16) |
본관 | 경주(慶州) |
이칭 | 이지공(李之公) |
시호 | 문충(文忠) |
호 | 익재(益齋)·역옹(櫟翁) |
자 | 중사(仲思) |
시대 | 조선 |
배우자 | 권보(權溥)의 딸 |
부 | 이진(李瑱) |
성격 | 문신, 학자, 문인 |
목차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내용
가계와 탄생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진(李瑱)이다. 아버지 이진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비로소 가문의 이름이 높아졌다.[1]
성장 과정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하여,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1301년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2] 이제현은 문과시험에 합격할 당시에 밀직사사 권영의 문하에 있었는데, 권영이 그의 학문과 뜻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장인인 권영의 가문은 이제현의 집안과 비교해 볼 때 세력이 막강했다. 처가의 배경은 그의 정치행로 및 학문에 큰 배경이 되었다. [3]
원나라 생활
1314년(충숙왕 1) 상왕(上王)인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원나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겼다. 이제현의 원나라 생활과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로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할 때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이제현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4]
귀국 후 활동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5]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되었다. 당시 문란하여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하여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 뒷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네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6]
1367년(공민왕 16)에 병으로 세상을 뜨니 향년 81세였다.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우봉현 도리촌 선영에 모셔졌다.[7]
학문 및 저술 활동
평가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이제현 묘지명 | 이색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이제현 | 이진 | A는 B의 아들이다 | |
권보 | 이제현 | A는 B의 스승이다 | |
이제현 | 고려 충선왕 | A는 B의 신하이다 | |
이제현 | 백이정 | A는 B의 스승이다 | |
이제현 | 이색 | A는 B의 스승이다 | |
이제현 | 본초편년강목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이제현 | 역옹패설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이제현 | 익재집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경주 구암서원 | 이제현 | A는 B을 배향하였다 | |
금천 도산서원 | 이제현 | A는 B을 배향하였다 | |
이제현 | 보은 이제현 영당 | A는 B을 배향하였다 | |
이제현 초상 | 이제현 | A는 B를 묘사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민백
- ↑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현 [李齊賢]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 ↑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현 [李齊賢] - 원 지배기에 고려를 지킨 정치가 (인물한국사)
- ↑ 민백
- ↑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현 [李齊賢] (두산백과)
- ↑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현 [李齊賢]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 ↑ "이제현", 인물한국사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김건곤, 『李齊賢 文學 硏究 : 詩와 古文을 中心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 민현구, "이제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용희, 『益齋 李齊賢의 史學思想 硏究』, 한국교육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
- 최두진, 「익재 이제현의 연행과 그 교육적 의의」,『한국교육학연구』19, 2013, 253-274쪽.
- 이익주, 「14세기 전반 성리학 수용과 이제현의 정치활동」, 『전농사론』 7, 2001, 263-279쪽.
- 박현규, 「이제현과 원 문사들과의 교류고」, 『동양한문학』3, 1990, 129-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