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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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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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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문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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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후는 해서를 잘 썼고, 송나라 [[구양순]]의 서법을 터득했다. [[원주 법천사지]]에 있는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의 비문과 [[전서|전액]]을 썼다. 『동국금석평』에 "법천사비의 음기는 [[유공권]]의 서법인데, 모서리가 나고 억세다."라고 하였다. 신라부터 조선 중기까지 명필들의 글시를 모은 『[[동국필원|동국필원(東國筆苑)]]』에도 안민후의 글씨가 전한다.<ref>국립문화재연구소, "안민후(安民厚)",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상,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113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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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州)이고, 시호는 정순(貞順)이다. 1062년(문종 16) 중서사인으로 재직하였다. 그해 국자사업(國子司業) 황항지(黃抗之)가 국자감시를 주관하였는데 등수를 매길 때 의론이 많아 시끄러웠다. 이에 정유산이 재시험을 주관하게 되자 왕에게 시험자의 이름을 풀로 붙여 가리고 암호로 기입하여 식별토록 하는 봉미법(封彌法)을 건의하여 최초로 시행시켰다.<ref>두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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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9년(문종 23) 상서좌승 우간의대부(尙書左丞右諫議大夫)가 되었으며, 1071년 한림학사가 되고, 다음해에는 한림학사 국자좨주(翰林學士國子祭酒)로서 지서북면추동번병마사(知西北面秋冬番兵馬使)를 겸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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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3년 2월 섭형부상서(攝刑部尙書)를 겸하였으며, 12월 예부상서가 되었다. 이듬해 4월 지공거(知貢擧)로서 이하(李蝦)·윤관(尹瓘) 등을 뽑았다. 1075년(문종 29) 참지정사 감수국사(參知政事監修國史)가 되고, 이어 이부상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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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년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문장에 뛰어나 당대에 명성을 떨쳤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났다. 1081년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은퇴하였으나,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왕의 정치자문에 응하였다. 시호는 정순(貞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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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6일 (금) 22:58 판

정유산(鄭惟産)
대표명칭 정유산
한자표기 鄭惟産
생몰년 ?-1091
본관 해주(海州)
시호 정순(貞順)
시대 고려
성격 문신
유형 인물



정의

고려 중기의 문신.

내용

海州)이고, 시호는 정순(貞順)이다. 1062년(문종 16) 중서사인으로 재직하였다. 그해 국자사업(國子司業) 황항지(黃抗之)가 국자감시를 주관하였는데 등수를 매길 때 의론이 많아 시끄러웠다. 이에 정유산이 재시험을 주관하게 되자 왕에게 시험자의 이름을 풀로 붙여 가리고 암호로 기입하여 식별토록 하는 봉미법(封彌法)을 건의하여 최초로 시행시켰다.[1]

1069년(문종 23) 상서좌승 우간의대부(尙書左丞右諫議大夫)가 되었으며, 1071년 한림학사가 되고, 다음해에는 한림학사 국자좨주(翰林學士國子祭酒)로서 지서북면추동번병마사(知西北面秋冬番兵馬使)를 겸임하였다. 1073년 2월 섭형부상서(攝刑部尙書)를 겸하였으며, 12월 예부상서가 되었다. 이듬해 4월 지공거(知貢擧)로서 이하(李蝦)·윤관(尹瓘) 등을 뽑았다. 1075년(문종 29) 참지정사 감수국사(參知政事監修國史)가 되고, 이어 이부상서가 되었다.

1077년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문장에 뛰어나 당대에 명성을 떨쳤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났다. 1081년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은퇴하였으나,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왕의 정치자문에 응하였다. 시호는 정순(貞順)이다.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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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두산

참고문헌

  • 국립문화재연구소, "안민후(安民厚)",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상,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1136쪽.
  • 한국사전연구사, 『미술대사전(인명편)』,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안민후", 미술사대사전(인명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