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굴암 본존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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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본존불의 명칭이다. [[항마촉지인]]은 [[선정인]]의 상태에서 오른손을 풀어 검지로 땅을 가리키는 형태로, 이 수인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성도할 때 지신(地神)을 깨우쳐 자신의 성도를 증명하게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ref>허균,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5999 경주 석굴암석굴 ② - 감은 듯 뜬 듯한 '三昧의 눈' 깨달음의 열락 전신에 가득]", 『불교신문』, 2006년 09월 20일.</ref>,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본존불이 경전에 나타나는 어느 부처님을 표현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고, 대체로 이 불상이 석가모니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견해에 익숙해져 있었다.<ref>이기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62 경주 석굴암 석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본존불의 명칭이다. [[항마촉지인]]은 [[선정인]]의 상태에서 오른손을 풀어 검지로 땅을 가리키는 형태로, 이 수인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성도할 때 지신(地神)을 깨우쳐 자신의 성도를 증명하게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ref>허균,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5999 경주 석굴암석굴 ② - 감은 듯 뜬 듯한 '三昧의 눈' 깨달음의 열락 전신에 가득]", 『불교신문』, 2006년 09월 20일.</ref>,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본존불이 경전에 나타나는 어느 부처님을 표현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고, 대체로 이 불상이 석가모니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견해에 익숙해져 있었다.<ref>이기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62 경주 석굴암 석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 ||
그러나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7324 석굴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 그러나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7324 석굴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 ||
− |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 + |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7324 석굴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
− | 한편, | + | 한편,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경주 불국사 |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경주 석굴암 석굴 |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7324 석굴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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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4일 (수) 22:59 판
경주 석굴암 본존불 (慶州 石窟庵 本尊佛) |
|
대표명칭 | 경주 석굴암 본존불 |
---|---|
한자표기 | 慶州 石窟庵 本尊佛 |
이칭 |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 본존불상 |
유형 | 불상 |
시대 | 신라 |
소장처 |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873-243 |
관련인물 | 김대성 |
|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석굴암 석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내용
석굴의 구조와 조각상
경주 석굴암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1]
조각상의 배치는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으로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2]
본존상의 명호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본존불의 명칭이다. 항마촉지인은 선정인의 상태에서 오른손을 풀어 검지로 땅을 가리키는 형태로, 이 수인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성도할 때 지신(地神)을 깨우쳐 자신의 성도를 증명하게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3],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본존불이 경전에 나타나는 어느 부처님을 표현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고, 대체로 이 불상이 석가모니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견해에 익숙해져 있었다.[4]
그러나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5]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6]
한편,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경주 석굴암 | 김대성 | A는 B가 창건하였다 | A ekc:founder B |
삼국유사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불국사고금창기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산중일기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석굴암",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석굴암",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허균, "경주 석굴암석굴 ② - 감은 듯 뜬 듯한 '三昧의 눈' 깨달음의 열락 전신에 가득", 『불교신문』, 2006년 09월 20일.
- ↑ 이기영 "경주 석굴암 석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석굴암",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석굴암",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석굴암",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허균, "경주 석굴암석굴 ② - 감은 듯 뜬 듯한 '三昧의 눈' 깨달음의 열락 전신에 가득", 『불교신문』, 2006년 09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