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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는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 군병이 수륙으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있으며, 충청도 군선이 함길도에 와서 야인(여진족)들과 힘을 합쳐 함길도 백성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고,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들도 함길도에 들어올 것이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어서 1467년(세조 13년) 5월 10일 지방을 순찰하기 위해 길주에 와 있던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 | 강효문(康孝文)]]을 밤중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길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천, 북청, 홍원으로 진격하면서 각지의 토호들을 선동하여 조정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아울러 조정에는 강효문이 함길도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기에 자신이 먼저 그를 죽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으며, 또한 강효문이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 신숙주(申叔舟)]] 등 조정의 대신들과 짜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하여 반란에 대한 대응을 늦추고자 하였다. 이에 세조는 당시 27세였던 구성군 [[이준 | 이준(龜城君 李浚)]], [[허종 | 허종(許琮)]],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등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또한 함길도 각지에 효유문을 보내어 백성들이 반란에 가담하지 못하게 설득하는 동시에 항복을 권유하였다. | 이시애는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 군병이 수륙으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있으며, 충청도 군선이 함길도에 와서 야인(여진족)들과 힘을 합쳐 함길도 백성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고,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들도 함길도에 들어올 것이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어서 1467년(세조 13년) 5월 10일 지방을 순찰하기 위해 길주에 와 있던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 | 강효문(康孝文)]]을 밤중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길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천, 북청, 홍원으로 진격하면서 각지의 토호들을 선동하여 조정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아울러 조정에는 강효문이 함길도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기에 자신이 먼저 그를 죽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으며, 또한 강효문이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 신숙주(申叔舟)]] 등 조정의 대신들과 짜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하여 반란에 대한 대응을 늦추고자 하였다. 이에 세조는 당시 27세였던 구성군 [[이준 | 이준(龜城君 李浚)]], [[허종 | 허종(許琮)]],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등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또한 함길도 각지에 효유문을 보내어 백성들이 반란에 가담하지 못하게 설득하는 동시에 항복을 권유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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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결과 및 영향=== | ===반란의 결과 및 영향=== | ||
====반란군 토벌 이후의 정황==== | ====반란군 토벌 이후의 정황==== | ||
− | 반란이 종결된 이후 세조는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구성군 이준 등 45명을 적개공신으로 책록하였다. 이들은 세조를 옹립하는 데 공헌하여 세조 즉위 이래 강력한 권세를 휘두르던 한명회 등 정난공신, 좌익공신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중에서도 구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 등의 젊은 신진세력들이 정계에서 두드러진 존재로 부상하였다. 이들과 기존의 재상들과의 갈등은 이후 [[구성군사건 | 구성군사건(龜城君事件)]], [[남이의 옥 | 남이의 옥(南怡-獄)]]으로 표출되게 된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적개공신에 책록됨으로써 출세하였는데, 경주 양동마을(慶州良洞)의 입향조 [[손소 | 손소(孫昭)]] 역시 이시애의 난 진압 때 공신이 되어 특진된 인물이다 | + | 반란이 종결된 이후 세조는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구성군 이준 등 45명을 적개공신으로 책록하였다. 이들은 세조를 옹립하는 데 공헌하여 세조 즉위 이래 강력한 권세를 휘두르던 한명회 등 정난공신, 좌익공신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중에서도 구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 등의 젊은 신진세력들이 정계에서 두드러진 존재로 부상하였다. 이들과 기존의 재상들과의 갈등은 이후 [[구성군사건 | 구성군사건(龜城君事件)]], [[남이의 옥 | 남이의 옥(南怡-獄)]]으로 표출되게 된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적개공신에 책록됨으로써 출세하였는데, 경주 양동마을(慶州良洞)의 입향조 [[손소 | 손소(孫昭)]] 역시 이시애의 난 진압 때 공신이 되어 특진된 인물이다. 아울러 반란 도중 유향소를 중심으로 결집한 현지의 토호들이 이시애에 호응하여 지방관을 살해하는 등 중앙의 통제에 반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유향소를 철폐하는 계기가 되었다.<ref>이재경,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31 이시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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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이 일어난 함길도에 대해서는 강온 양면의 처우가 이루어졌다. 함길도의 민폐를 덜어주는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함길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통치를 강화하였다. 또한 반란이 일어난 길주는 길성(吉城)현으로 강등시켰다. 아울러 반란 도중 유향소를 중심으로 결집한 현지의 토호들이 이시애에 호응하여 지방관을 살해하는 등 중앙의 통제에 반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유향소를 철폐하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성종대 김종직은 유향소의 복설을 주장하면서 유향소가 이시애의 난 이후로 철폐되는 데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조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일어난 반란이 결과적으로는 중앙집권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ref>이재경,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31 이시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반란이 일어난 함길도에 대해서는 강온 양면의 처우가 이루어졌다. 함길도의 민폐를 덜어주는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함길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통치를 강화하였다. 또한 반란이 일어난 길주는 길성(吉城)현으로 강등시켰다. 아울러 반란 도중 유향소를 중심으로 결집한 현지의 토호들이 이시애에 호응하여 지방관을 살해하는 등 중앙의 통제에 반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유향소를 철폐하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성종대 김종직은 유향소의 복설을 주장하면서 유향소가 이시애의 난 이후로 철폐되는 데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조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일어난 반란이 결과적으로는 중앙집권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ref>이재경,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31 이시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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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 ===관계정보=== |
2017년 10월 4일 (수) 13:43 판
이시애의 난(李施愛─亂) | |
대표명칭 | 이시애의 난 |
---|---|
한자표기 | 李施愛─亂 |
시대 | 조선 |
날짜 | 1467년 5월 |
관련인물 | 이시애 |
목차
정의
1467년(세조 13년) 세조(조선)(世祖)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반발해 이시애(李施愛)가 함길도민을 규합하여 일으킨 반란.
내용
반란의 배경
이시애는 대대로 함길도에서 세력을 가진 호족으로서, 태조 이성계처럼 변방에서 성장한 집안의 후손이자, 3대째 함길도에 세력을 가진 토호였다. 함길도(함경도의 당시 지명)는 조선 개국 이래로 효율적인 국경 방어를 위해 본토 출신 호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대대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함길도의 토호들은 이를 통해 기반을 다져 왔다. 그런데 세조 대에 북도 출신의 수령 대신 중앙에서 남도 출신의 수령을 파견하고, 호패법으로 북방 인구를 단속하는 등 중앙집권적 정책을 실시하여 토호들의 불만이 점차 쌓이게 되었다. 특히 함길도의 호족들은 고향을 떠나 그들의 세력 아래로 들어온 백성들이 호패법으로 인해 본고장으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여 더욱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균역에 대한 법인 보법의 반포는 토호들의 반발심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시애는 그 자신이 북방의 토호로서 세조의 중앙집권책에 피해를 보는 입장이었던 데다가, 함길도의 호족과 일반 백성들이 모두 중앙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이들을 선동하여 함길도의 험한 지세와 강력한 병력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야심을 갖게 되었다. [1]
반란의 전개
이시애는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 군병이 수륙으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있으며, 충청도 군선이 함길도에 와서 야인(여진족)들과 힘을 합쳐 함길도 백성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고,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들도 함길도에 들어올 것이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어서 1467년(세조 13년) 5월 10일 지방을 순찰하기 위해 길주에 와 있던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을 밤중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길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천, 북청, 홍원으로 진격하면서 각지의 토호들을 선동하여 조정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아울러 조정에는 강효문이 함길도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기에 자신이 먼저 그를 죽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으며, 또한 강효문이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 조정의 대신들과 짜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하여 반란에 대한 대응을 늦추고자 하였다. 이에 세조는 당시 27세였던 구성군 이준(龜城君 李浚), 허종(許琮),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등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또한 함길도 각지에 효유문을 보내어 백성들이 반란에 가담하지 못하게 설득하는 동시에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의 결과 및 영향
반란의 결과 및 영향
반란군 토벌 이후의 정황
반란이 종결된 이후 세조는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구성군 이준 등 45명을 적개공신으로 책록하였다. 이들은 세조를 옹립하는 데 공헌하여 세조 즉위 이래 강력한 권세를 휘두르던 한명회 등 정난공신, 좌익공신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중에서도 구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 등의 젊은 신진세력들이 정계에서 두드러진 존재로 부상하였다. 이들과 기존의 재상들과의 갈등은 이후 구성군사건(龜城君事件), 남이의 옥(南怡-獄)으로 표출되게 된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적개공신에 책록됨으로써 출세하였는데, 경주 양동마을(慶州良洞)의 입향조 손소(孫昭) 역시 이시애의 난 진압 때 공신이 되어 특진된 인물이다. 아울러 반란 도중 유향소를 중심으로 결집한 현지의 토호들이 이시애에 호응하여 지방관을 살해하는 등 중앙의 통제에 반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유향소를 철폐하는 계기가 되었다.[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이시애 | 이시애의 난 | A는 B를 주도하였다 | |
세조 | 이시애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
이시합 | 이시애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
이명효 | 이시애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
이준 | 이시애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
손소 | 이시애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
호패법 | 이시애의 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신숙주 | 이시애의 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신명 | 이시애의 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신숙주 | 신명 | A는 형제 B가 있다 | |
허종 | 이시애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
허준 | 허종 | A는 형제 B가 있다 |
시각자료
영상
이시애의 난[3]
주석
- ↑ 이재경, "이시애",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재경, "이시애",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시애의 난", 문화원형백과: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정변,
『문화콘텐츠닷컴 』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0. 온라인 참조: "이시애의 난", 문화원형백과,『네이버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동희, 「이시애 (李施愛) 난 (亂)에 있어서 한명회 (韓明澮) , 신숙주 (申叔舟)의 역모 연루설」, 『全羅文化論叢』vol.7,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4.
- 단행본
- 민병덕·김현묵, 『반역의 한국사』, 책이있는마을, 2016.
- 이규철 외 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편, 『전란으로 읽는 조선 : 반란과 전쟁, 혁명이 바꾼 조선과 동아시아』, 글항아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