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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민족기록화 유적 경주 | + | 파일:민족기록화 유적 경주 석굴암 석굴 내부전경.jpg | 석굴암 내부 전경<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Directory_Image.jsp?VdkVgwKey=11,00240000,37&imgfname=1612705.jpg&dirname=national_treasure&photoname=%EB%A9%80%EB%A6%AC%EC%84%9C%20%EB%B0%94%EB%9D%BC%EB%B3%B8%20%EC%84%9D%EA%B5%B4%EC%95%94%EC%84%9D%EA%B5%B4&photoid=1612705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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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민족기록화 유적 경주 석굴암 석굴 본존불 정면.jpg | 석굴암 본존불 정면<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Directory_Image.jsp?VdkVgwKey=11,00240000,37&imgfname=1612717.jpg&dirname=national_treasure&photoname=%EA%B2%BD%EC%A3%BC%20%EC%84%9D%EA%B5%B4%EC%95%94%20%EC%84%9D%EA%B5%B4%20(%EB%B3%B8%EC%A1%B4%EB%B6%88%20%EC%A0%95%EB%A9%B4)&photoid=1612717#pr2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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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민족기록화 유적 경주 석굴암 석굴 천정.jpg | 석굴암 천정<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Directory_Image.jsp?VdkVgwKey=11,00240000,37&imgfname=1612715.jpg&dirname=national_treasure&photoname=%EC%84%9D%EA%B5%B4%EC%95%94%EC%84%9D%EA%B5%B4%20%EC%B2%9C%EC%A0%95&photoid=1612715#pr2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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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주석'''== |
2017년 10월 4일 (수) 00:23 판
경주 석굴암 (慶州 石窟庵) |
|
대표명칭 | 경주 석굴암 |
---|---|
한자표기 | 慶州 石窟庵 |
이칭 | 경주 석굴암 석굴, 석굴암 |
유형 | 석굴 |
시대 | 신라 |
지정번호 | 국보 제24호 |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소장처 |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873-243 |
관련인물 | 김대성 |
|
목차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서쪽 중턱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1]
내용
김대성이 창건
석굴암은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 김대성(金大誠)이 전생(前生)의 부모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경주 토함산 정상 바로 밑에 동쪽 바다를 향하여 인공으로 석굴을 만들고 그 안에 본존 여래좌상을 비롯하여 38구의 불교 조각상을 안치해 놓은 석굴사찰이다. 그는 동시에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웠다. 석굴암은 혜공왕 10년(774) 김대성이 죽은 뒤 나라에서 완성시켰는데, 석굴암의 축조는 시작부터 완성까지 30여 년이 걸린 대역사였다.[2]
석굴 구조
석굴암은 크게 장방형의 전실(前室)과 원형(圓形)의 주실(主室), 그리고 전실과 주실을 연결시켜주는 통로인 비도(扉道)로 이루어져 있다. 공양과 예배를 드리기 위한 4각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의 팔부신상(八部神像)을 두고, 비도 입구 좌우벽에는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다. 폭이 좁아진 4각형 비도에는 좌우에 2구씩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시립시켜 불천(佛天)을 수호하도록 하였다.[3]
굴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 돌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돋우었고, 이곳을 지나면 평면의 둥근 굴실에 본존이 중심에서 약간 뒤로 치우쳐 안치되어 있다. 입구 좌우로부터 천부상(天部像) 2구, 보살상(菩薩像) 2구, 나한상(羅漢像) 10구로 주위의 벽을 채우고, 본존 바로 뒷면에는 다시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 입상을 두고 있다. 전ㆍ후실을 통하여 불상의 밑에는 상(像) 하나에 1좌(座)씩의 고식(古式)에 따른 안상석(眼象石)을 돌려놓았다.[4]
풀어야할 과제
석굴암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최고의 건축 예술이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정확한 원형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실의 형식에 대해 굴절설과 전개설이 맞서고 있고, 목조 전실의 지붕 모양에 대해서도 이견들이 있다. 심지어 석실 앞쪽 상부에 천창이 있었다는 주장까지 맞물려 논쟁 중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의 파괴적 보수와 해방 후 성급한 복원으로 아직도 습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경주 석굴암 | 김대성 | A는 B가 창건하였다 | A ekc:founder B |
삼국유사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불국사고금창기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산중일기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이기영 "경주 석굴암 석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경주 석굴암"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석굴암석굴",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석굴암석굴",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경주 석굴암"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건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