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형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34번째 줄: 34번째 줄:
  
 
===가계와 탄생===
 
===가계와 탄생===
−
{{Blockquote|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br/>*원문(같은책 311쪽: 母金氏 魂交之夕 忽得休徵 見胡僧入房 擎玉案爲寄 ▨欻焉驚覺 尋報藁砧 答云必生懷寳之兒 先告弄璋之慶 ▨後▨於室內 每有鐙煇之▨▨)</ref>}}
+
{{Blockquote|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ref>}}
 
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ref>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ref>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2쪽.</ref> 대사는 수승한 상호(殊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ref>
 
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ref>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ref>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2쪽.</ref> 대사는 수승한 상호(殊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ref>
 
   
 
   
45번째 줄: 45번째 줄:
  
 
===입당유학===
 
===입당유학===
−
형미가 당시 [[가지산문]]을 열었던 [[체징]]의 법도를 받아 이었지만, 출가한지 2년만인 880년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형미는 당시 유명한 남종 선사인 [[도응|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고자 하였다.
 
 
{{Blockquote|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5쪽.</ref>}}
 
{{Blockquote|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5쪽.</ref>}}
 +
형미는 [[가지산문]]을 열었던 [[체징]]의 법도를 받아 이었지만, 출가한 지 불과 2년 만에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형미는 당시 유명한 남종 선사인 [[도응|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고자 하였고,<ref>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ref> 89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
운거도응 밑에서 수학한 사무외대사
+
이때 형미를 비롯하여 [[경유|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여엄|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이엄|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등 신라 출신의 승려 네 명이 운거도응대사 밑에서 동문수학하여 모두 인가를 받았고, 이들은 해동의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즉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 스님"으로 일컬어졌다.<ref>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ref> 이들 사무외대사는 이후 고려를 건국한 [[왕건|태조 왕건]]의 스승이 되었다.<ref>방학봉,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일송북, 2004, 255쪽.</ref>
−
형미, 법경대사 경유, 대경대사 여엄, 진철대사 이엄
 
  
 +
===귀국 및 활동===
 +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형미는 905년 무주로 돌아온 후, 무주의 실력자 왕지본(王池本)의 후원을 받으면서 무위갑사에서 8년간(905-912) 주석하였다.
  
−
===귀국 및 활동===
+
{{Blockquote|이때에 대왕께서는 일찍이 대사가 근래에 오월(吳越)에서 우리나라[秦韓]로 들어오셔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바닷가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바깥에 감추고 계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
계셨다. 그래서 먼저 글[丹詔]을 보내어 스님의 도간(道竿)에 공경을 표시하니, 대사는 왕명[制]을 받들어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려왔다. ...(중략)... 그 후 군대를 돌이킬 때에 특별히 (스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고, 2~3일 사이에 북쪽해안에 이르렀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8쪽.</ref>}}
 +
그러던 중 912년 [[궁예]]가 [[왕건]]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과 무주(지금의 광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하였다. 궁예는 형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하여 친견하였고, 나주 지역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태봉(泰封)으로 회군할 때 형미를 태봉의 수도 철원으로 함께 모시고 갔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ref><ref>기존의 해석에서는 위에 인용된 비문의 "대왕(大王)"을 왕건으로 해석하여 형미를 태봉으로 초빙한 주체를 왕건으로 이해하였지만, 비문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대왕"은 궁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ref>
  
 
===입적===
 
===입적===
 +
철원에서 궁예의 우대를 받던 형미는 917년 궁예 반대세력과의 연결을 의심받아 궁예에게 피살되었으니,<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9쪽.</ref>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세였다.
 +
{{Blockquote|이때에 개울과 못이 갑자기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세계의 빛이 변하였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9쪽.</ref>}}
  
−
 
+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형미를 기리기 위하여 산사(山寺)를 짓고 탑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을 편광령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였다.
−
---
 
−
체징(體澄)은 804년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지방인 웅진(熊津)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그는 물을 관장하는 전설 속의 신(神)인 하백(河伯)과 같이 건장한 체격을 가진 금발 머리의 아이었다고 전해진다.<ref>비문</ref> 체징은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827년(흥덕왕 2) 24세의 나이에 오늘날 충청남도 서산에 위치한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하고 있던 [[염거|염거(廉居)]]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염거는 신라에 처음으로 선종(禪綜)을 도입한 승려인 도의(道義)의 제자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체징은 도의부터 이어지는 법맥을 전해 받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ref>조범환, 新羅 下代 體澄 禪師와 迦智山門의 개창, 정신문화연구 Vol.28 No.3, 2005, 7쪽.</ref> 837년(희강왕 2) 체징은 동료들과 함께 당나라로의 유학을 떠났으나, 자신이 배웠던 선법이 중국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바로 귀국하였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 ''불교사의 이해'', (주)조계종출판사, 2014, 171쪽.</ref> 이후 체징은 858년(헌안왕 2) 부터 무주(武州) 황학(黃壑)의 난약(蘭若)에 머물렀는데, 당시 왕인 헌안왕(憲安王)은 장사현(長沙縣) 부사(副使) [[김언경|김언경(金彦卿)]]을 파견하여 체징을 서울(경주)로 모시고자 하였다. 체징은 여러번 고사하였으나, 거듭된 왕의 요청에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갔으며, 그곳에서 [[장흥 보림사|보림사(寶林寺)]]를 중건하였다. 체징은 880년(헌강왕 6) 77세의 나이로 입적할때까지 도의로부터 이어지는 선법(禪法)을 전파하였다.  
 
−
---
 
  
 
<html>
 
<html>
106번째 줄: 108번째 줄:
  
 
=='''참고문헌'''==
 
=='''참고문헌'''==
−
*조범환, 「新羅 下代 體澄 禪師와 迦智山門의 개창」, 『정신문화연구』 Vol.28 No.3,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3-24쪽.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3-222쪽.
−
*최선희, 「체징과 가지산문 개창」, 『역사학연구』, 호남사학회 25, 2005, 1-27쪽.
 
−
*이계표, 「신라 하대의 가지산문」, 『역사학연구』, 호남사학회 7, 1993, 265-294쪽.
 
−
*곽승훈, 「김영의 보조선사비명 찬술」, 『신라사학보』 제27호, 신라사학회, 2013.4, 197-232쪽.
 
  
 
=='''각주'''==
 
=='''각주'''==

2017년 2월 21일 (화) 20:50 판


형미(逈微)()
Seongaktapbi.jpg
대표명칭 형미(逈微)
영문명칭 Hyeongmi
생몰년 864(경문왕 4)-917(경명왕 1)
시호 선각대사(先覺大師)
휘 형미(逈微)
탑호 편광(遍光)
성씨 최씨(崔氏)
본관 박릉(博陵)
출신지 무주(武州: 현재의 광주)
승탑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Quote-left.png 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1] Quote-right.png
출처:


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2]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3] 대사는 수승한 상호(殊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4]

출가수행

Quote-left.png 체징선사가 “처음 보는 순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전이거늘 어찌 그리 늦었는가”하며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5] Quote-right.png
출처:


878년 장흥 보림사로 출가하여 보조선사 체징의 제자가 되었으며, 882년 구례 화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Quote-left.png 중화(中和) 2년에 이르러 화엄사 관단(官壇)에서 비구계를 받을 때 대사가 계단에 올라가 제자리에 앉는 순간 백색 무지개 기운이 법당을 가득 덮었다.[6] Quote-right.png
출처:


891년

입당유학

Quote-left.png 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7] Quote-right.png
출처:


형미는 가지산문을 열었던 체징의 법도를 받아 이었지만, 출가한 지 불과 2년 만에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형미는 당시 유명한 남종 선사인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고자 하였고,[8] 89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형미를 비롯하여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등 신라 출신의 승려 네 명이 운거도응대사 밑에서 동문수학하여 모두 인가를 받았고, 이들은 해동의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즉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 스님"으로 일컬어졌다.[9] 이들 사무외대사는 이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스승이 되었다.[10]

귀국 및 활동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형미는 905년 무주로 돌아온 후, 무주의 실력자 왕지본(王池本)의 후원을 받으면서 무위갑사에서 8년간(905-912) 주석하였다.


Quote-left.png 이때에 대왕께서는 일찍이 대사가 근래에 오월(吳越)에서 우리나라[秦韓]로 들어오셔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바닷가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바깥에 감추고 계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계셨다. 그래서 먼저 글[丹詔]을 보내어 스님의 도간(道竿)에 공경을 표시하니, 대사는 왕명[制]을 받들어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려왔다. ...(중략)... 그 후 군대를 돌이킬 때에 특별히 (스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고, 2~3일 사이에 북쪽해안에 이르렀다.[11]

Quote-right.png
출처:


그러던 중 912년 궁예가 왕건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과 무주(지금의 광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하였다. 궁예는 형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하여 친견하였고, 나주 지역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태봉(泰封)으로 회군할 때 형미를 태봉의 수도 철원으로 함께 모시고 갔다.[12][13]

입적

철원에서 궁예의 우대를 받던 형미는 917년 궁예 반대세력과의 연결을 의심받아 궁예에게 피살되었으니,[14]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세였다.

Quote-left.png 이때에 개울과 못이 갑자기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세계의 빛이 변하였다.[15] Quote-right.png
출처: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형미를 기리기 위하여 산사(山寺)를 짓고 탑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을 편광령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였다.

동영상

  •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_#001~004 (방송일: 2002.11.08)

관련항목

node relation node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는 -를 위한 비이다 형미(逈微)
체징(體澄) 는 -의 스승이다 형미(逈微)
운거도응선사(雲居道膺禪師) 는 -의 스승이다 형미(逈微)
형미(逈微) 는 -에서 주석하였다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형미(逈微) 는 -에서 수행하였다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형미(逈微) 는 -에서 계를 받았다 구례 화엄사(求禮 華嚴寺)
궁예(弓裔) 는 -와 관련있다 형미(逈微)
왕건(王建) 는 -와 관련있다 형미(逈微)
왕건(王建) 는 -의 이름을 지었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는 -에 있다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는 -가 비문을 지었다 최언위(崔彦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는 -가 비문을 썼다 유훈율(柳勳律)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는 -가 비문을 새겼다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

참고문헌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3-222쪽.

각주

  1.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
  2. ↑ 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
  3.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2쪽.
  4.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
  5.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324쪽.
  6.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4쪽.
  7.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5쪽.
  8. ↑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
  9. ↑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
  10. ↑ 방학봉,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일송북, 2004, 255쪽.
  11.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8쪽.
  12.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13. ↑ 기존의 해석에서는 위에 인용된 비문의 "대왕(大王)"을 왕건으로 해석하여 형미를 태봉으로 초빙한 주체를 왕건으로 이해하였지만, 비문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대왕"은 궁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14.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9쪽.
  15.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