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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6년([[조선 명종|명종]] 16) 금나라에 사절로 다녀왔고, 이후 우부승지·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한림학사로서 지공거가 되었다. 지주사(知奏事)·추밀원동지사를 거쳐, 정당문학·참지정사·예부판사에 이르렀다. 문장과 서예에 능하여 특히 [[초서]]·[[예서]]를 잘 썼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34640 유공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1186년([[조선 명종|명종]] 16) 금나라에 사절로 다녀왔고, 이후 우부승지·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한림학사로서 지공거가 되었다. 지주사(知奏事)·추밀원동지사를 거쳐, 정당문학·참지정사·예부판사에 이르렀다. 문장과 서예에 능하여 특히 [[초서]]·[[예서]]를 잘 썼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34640 유공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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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에 시가 남아 있고, 『[[해동필원|해동필원(海東筆苑)]]』에 필적이 전하며,<ref>민병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261 유공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ref> 글씨로 경기도 [[용인 서봉사|용인 서봉사((龍仁 端鳳寺)]]의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현오선사비(玄悟禪師碑)]]가 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34640 유공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동문선]]』에 시가 남아 있고, 『[[해동필원|해동필원(海東筆苑)]]』에 필적이 전하며,<ref>민병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261 유공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ref> 글씨로 경기도 [[용인 서봉사|용인 서봉사((龍仁 端鳳寺)]]의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현오선사비(玄悟禪師碑)]]가 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34640 유공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2017년 10월 1일 (일) 16:03 판
유공권(柳公權) | |
대표명칭 | 유공권 |
---|---|
한자표기 | 柳公權 |
생몰년 | 1132년-1196년 |
본관 | 문화(文化) |
시호 | 문간(文簡) |
자 | 정평(正平) |
시대 | 고려시대 |
국적 | 고려 |
유형 | 문신 |
정의
고려시대의 문신.
내용
1186년(명종 16) 금나라에 사절로 다녀왔고, 이후 우부승지·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한림학사로서 지공거가 되었다. 지주사(知奏事)·추밀원동지사를 거쳐, 정당문학·참지정사·예부판사에 이르렀다. 문장과 서예에 능하여 특히 초서·예서를 잘 썼다.[1]
1195년(명종 25) 병으로 퇴직을 요청했으나 왕이 그의 글재주를 아꼈기 때문에 “조정에 덕망이 높은 원로가 남아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인데 경은 왜 빨리 물러나려 하는가?”라 하며 보내지 않으려 했다. 유공권이 세 번이나 글을 올리니 그제야 사직을 허락하였다. 한해 뒤 병이 들어 친족들이 약을 올렸으나“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라며 물리치고 약을 먹지 않았다.[2]
『동문선』에 시가 남아 있고, 『해동필원(海東筆苑)』에 필적이 전하며,[3] 글씨로 경기도 용인 서봉사((龍仁 端鳳寺)의 현오선사비(玄悟禪師碑)가 있다.[4]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유공권 | 조선 명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유공권 | 동문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유공권 | 해동필원 | A는 B를 관련있다 | A edm:isRelatedTo B |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 유공권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A ekc:calligrapher B |
주석
- ↑ "유공권",
『두산백과』online . - ↑ 동아대학교 성당학술원, 『국역 고려사:열전』, 경인문화사, 2006. 온라인참조:"유공권", 국역 고려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민병하, "유공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 ↑ "유공권",
『두산백과』online .
참고문헌
- "유공권",
『두산백과』online . - 동아대학교 성당학술원, 『국역 고려사:열전』, 경인문화사, 2006. 온라인참조:"유공권", 국역 고려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유공권",
『두산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