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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1794년(숙종 20) 폐출된 [[인현왕후|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고 왕후가 되었던 [[조선 경종|세자]]의 [[희빈 장씨|생모 장씨]]를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시키는 조치와 함께 남인(南人)이 축출되고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치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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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숙종 20)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고 왕후가 되었던 [[조선 경종|세자]]의 [[희빈 장씨|생모 장씨]]를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시키는 조치와 함께 남인(南人)이 축출되고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치적 사건이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내용==
 
==내용==
===환국의 정의===
 
환국이란 주도 정치세력의 급격한 교체로 인한 정국의 대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에 붕당정치론이 수용된 이후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의 정치 세력이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공존적 협력을 유지하며 정치 운영을 해나갔다. 그러나 [[조선 숙종|숙종]]대에서 [[조선 영조|영조]]대 초반에 걸쳐 서인 대 남인, 노론 대 소론의 정치 세력의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져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정국 운영이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의 정치를 환국정치라고 부른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PAGENAME}} 이전의 정치상황===
 
====노론과 소론의 등장====
 
1680년 [[경신환국]]으로 [[김석주|김석주(金錫胄)]]를 중심으로 한 서인 훈척 계열이 군사적 실권을 독점하며 정국을 주도하였다. 김석주는 군제 개혁을 주관하면서 [[금위영|금위영(禁衛營)]]이라는 새로운 군영을 창설하였다. 1682년 남인 [[허새|허새(許璽)]] 등이 [[복평군|복평군(福平君)]]을 추대하려 한다는 역모가 고발된 이후 증거가 불충분한 사건의 처리방향을 두고 훈척과 연소 신료들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서인계 관료와 지식인들은 각각 지지하는 입장에 따라 분화되었고 [[송시열|송시열(宋時烈)]]과 [[윤증|윤증(尹拯)]] 간의 사제간 갈등이 이에 결부되면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붕당이 성립되었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1688년 10월 남인과 연결되어 있는 역관 집안 출신의 [[희빈 장씨|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듬해 [[조선 숙종|숙종]]은 태어난 지 두 달된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 즉 차기에 왕위를 계승할 아이로 못박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서인 신료들은 왕비 [[인현왕후]]가 아직 젊고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숙종이 이를 고집하여 왕자를 원자로 정했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1688년 10월 남인과 연결되어 있는 역관 집안 출신의 [[희빈 장씨|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듬해 [[조선 숙종|숙종]]은 태어난 지 두 달된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 즉 차기에 왕위를 계승할 아이로 못박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서인 신료들은 왕비 [[인현왕후]]가 아직 젊고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숙종이 이를 고집하여 왕자를 원자로 정했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기사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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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환국]]의 경과===
1789년 2월 노론계의 영수이자 산림인 [[송시열]]이 원자 정호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숙종은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하는 동시에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계 인물들로 대체시키는 [[기사환국]]을 단행했다. [[인현왕후]]는 투기를 일삼는다는 이유로 폐출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 1690년 6월에는 3세의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권대운|권대운(權大運)]], [[목내선|목내선(睦來善)]] 등이 진출한 남인 정권 아래에서 왕비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장희재(張希載)]]가 관례를 뛰어넘어 [[총융사|총융사(摠戎使)]]로 발탁되고, 역관으로 막대한 재부를 이루고 있던 장씨 가문의 인물들은 과도한 사치로 눈총을 받았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PAGENAME}}의 경과===
 
 
====[[남인]]과 [[숙원 최씨]] 독살 사건====
 
====[[남인]]과 [[숙원 최씨]] 독살 사건====
1794년 3월 [[민암|우의정 민암(閔黯)]]이 소론계 [[한중혁|한중혁(韓重赫)]]이 돈을 모아 [[장희재]]나 [[동평군|동평군 항(東平君 杭)]] 등 실권자에게 접근하여 궁중의 틈을 엿보았고, [[김춘택|김춘택(金春澤)]] 등도 이에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을 아뢰었다.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문초를 했으나 완강하게 부인하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던 때에 또 다른 고변서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장희재]]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숙원 최씨|숙원(淑媛) 최씨]]를 독살하려 했고, 또 신천군수와 훈국별장 등이 반역을 도모하는데 민암 등 남인이 결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민암]]이 최초의 고변의 사주자라는 것이 밝혀진 후 [[조선 숙종|숙종]]은 다시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남인계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래선]] 등이 관작이 삭탈되어 문외출송 당했고 [[민암]], [[유명현|유명현(柳命賢)]] 등이 모두 유배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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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 3월 [[민암|우의정 민암(閔黯)]]이 소론계 [[한중혁|한중혁(韓重赫)]]이 돈을 모아 [[장희재]]나 [[동평군|동평군 항(東平君 杭)]] 등 실권자에게 접근하여 궁중의 틈을 엿보았고, [[김춘택|김춘택(金春澤)]] 등도 이에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을 아뢰었다.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문초를 했으나 완강하게 부인하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던 때에 또 다른 고변서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장희재]]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숙원 최씨|숙원(淑媛) 최씨]]를 독살하려 했고, 또 신천군수와 훈국별장 등이 반역을 도모하는데 민암 등 남인이 결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민암]]이 최초의 고변의 사주자라는 것이 밝혀진 후 [[조선 숙종|숙종]]은 다시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남인계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래선]] 등이 관작이 삭탈되었고 [[민암]], [[유명현|유명현(柳命賢)]] 등이 모두 유배형을 받았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남인의 몰락과 서인의 정계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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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의 몰락과 [[서인]]의 정계 주도====
갑술환국으로 그 때까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던 남인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직당했다. 더욱이 일부 남인들이 영조대 무신란에 참여하면서 남인들의 정치적 입지는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영조대에 탕평 정국에서 남인 [[오광운|청류 오광운(吳光運)]]이 탕평책에 호응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그 이후 [[채제공|채제공(蔡濟恭)]]이 정조대까지 남인들의 구심 역할을 하며 정계에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반면 서인의 정치적 주도권은 더욱 확실해졌다. 송시열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내리도록 했고, 기사환국 이후 문묘에서 출향되었던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도 다시 실현되었다.<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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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환국]]으로 [[남인]]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직당했다. 더욱이 일부 남인들이 [[조선 영조|영조]]대 무신란에 참여하면서 남인들의 정치적 입지는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영조대에 탕평 정국에서 남인 [[오광운|청류 오광운(吳光運)]]이 탕평책에 호응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그 이후 [[채제공|채제공(蔡濟恭)]]이 [[조선 정조|정조]]대까지 남인들의 구심 역할을 하며 정계에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반면 서인의 정치적 주도권은 더욱 확실해졌다. ]]송시열]]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내리도록 했고, [[기사환국]] 이후 문묘에서 출향되었던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도 다시 실현되었다.<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인현왕후의 복위와 희빈 장씨의 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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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와 [[희빈 장씨]]의 폐위====
숙종은 오랫동안 폐서인되어 친정집으로 돌아가 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왕비 장씨는 다시 옛 작호로 강등시켰다. 다만 [[조선 경종|세자]]의 생모로서의 지위는 유지하도록 하고 사친에 대한 예를 취하도록 했다. 그러나 [[희빈 장씨]]는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었을 때 저주를 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자진하라는 명을 받았다.<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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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은 폐위되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왕비 장씨는 다시 옛 작호로 강등시켰다. 다만 [[조선 경종|세자]]의 생모로서의 지위는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희빈 장씨]]는 1701년 [[인현왕후]]가 죽었을 때 저주를 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받았다.<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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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9일 (금) 18:45 판

갑술환국(甲戌換局)
대표명칭 갑술환국
한자표기 甲戌換局
이칭 갑술옥사, 감술경화
시대 조선
날짜 1694년
관련인물 인현왕후, 조선 숙종, 희빈 장씨
관련단체 금위영
관련유물유적 한산이씨 고행록


정의

1794년(숙종 20) 폐출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고 왕후가 되었던 세자생모 장씨를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시키는 조치와 함께 남인(南人)이 축출되고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치적 사건이다. [1]

내용

인현왕후희빈 장씨

1688년 10월 남인과 연결되어 있는 역관 집안 출신의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듬해 숙종은 태어난 지 두 달된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 즉 차기에 왕위를 계승할 아이로 못박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서인 신료들은 왕비 인현왕후가 아직 젊고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숙종이 이를 고집하여 왕자를 원자로 정했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2]

갑술환국의 경과

남인숙원 최씨 독살 사건

1794년 3월 우의정 민암(閔黯)이 소론계 한중혁(韓重赫)이 돈을 모아 장희재동평군 항(東平君 杭) 등 실권자에게 접근하여 궁중의 틈을 엿보았고, 김춘택(金春澤) 등도 이에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을 아뢰었다.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문초를 했으나 완강하게 부인하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던 때에 또 다른 고변서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장희재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숙원(淑媛) 최씨를 독살하려 했고, 또 신천군수와 훈국별장 등이 반역을 도모하는데 민암 등 남인이 결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민암이 최초의 고변의 사주자라는 것이 밝혀진 후 숙종은 다시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남인계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래선 등이 관작이 삭탈되었고 민암, 유명현(柳命賢) 등이 모두 유배형을 받았다. [3]

남인의 몰락과 서인의 정계 주도

갑술환국으로 남인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직당했다. 더욱이 일부 남인들이 영조대 무신란에 참여하면서 남인들의 정치적 입지는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영조대에 탕평 정국에서 남인 청류 오광운(吳光運)이 탕평책에 호응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그 이후 채제공(蔡濟恭)정조대까지 남인들의 구심 역할을 하며 정계에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반면 서인의 정치적 주도권은 더욱 확실해졌다. ]]송시열]]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내리도록 했고, 기사환국 이후 문묘에서 출향되었던 이이성혼의 문묘 배향도 다시 실현되었다.[4]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와 희빈 장씨의 폐위

조선 숙종은 폐위되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왕비 장씨는 다시 옛 작호로 강등시켰다. 다만 세자의 생모로서의 지위는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희빈 장씨는 1701년 인현왕후가 죽었을 때 저주를 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받았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경신환국 김석주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0년
금위영 김석주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허새 복평군 추대 사건 A는 B를 주도하였다 1682년
송시열 윤증 A는 B의 스승이다
인현왕후 조선 숙종 A는 B의 아내이다
희빈 장씨 조선 숙종 A는 B의 아내이다
조선 숙종 갑술환국 A는 B를 주도하였다 1694년
인현왕후 갑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희빈 장씨 갑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경종 희빈 장씨 A는 어머니 B가 있다
송시열 기사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숙종 기사환국 A는 B를 주도하였다 1789년
인현왕후 기사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희빈 장씨 기사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권대운 기사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목내선 기사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장희재 기사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희빈 장씨 장희재 A는 B의 형제이다
권대운 남인 A는 B에 소속된다
목내선 남인 A는 B에 소속된다
장희재 남인 A는 B에 소속된다
송시열 노론 A는 B에 소속된다
윤증 소론 A는 B에 소속된다
장희재 갑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민암 갑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숙원 최씨 갑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숙원 최씨 조선 숙종 A는 B의 아내이다
조선 영조 숙원 최씨 A는 어머니 B가 있다
남구만 갑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1794년
유명현 갑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유명현 남인 A는 B에 소속된다
권대운 남인 A는 B에 소속된다
목래선 남인 A는 B에 소속된다
권대운 갑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목래선 갑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채제공 남인 A는 B에 소속된다
오광운 남인 A는 B에 소속된다
갑술환국 한산이씨 고행록 A는 B와 관련이 있다

주석

  1.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 이건창, 『당의통략 : 조선시대 당쟁(黨爭)의 기록』, 자유문고, 2015.
  • 논문
    • 김현아, 「肅宗代 己巳·甲戌換局期 南人의 執權과 沒落」,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 이상식, 「朝鮮後期 肅宗의 政局運營과 王權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 오경택, 「17세기 政局動向과 南人系 宋尙周의 정치활동」, 『한국학논총』,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