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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출처=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 병술 2번째기사. 온라인 참조: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6015_002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 병술 2번째기사. 온라인 참조: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6015_002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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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 병술 2번째기사. 온라인 참조: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6015_002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병술) 두번째 기사. 온라인 참조: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6015_002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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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은 선체 위에 상장(上粧)을 꾸려 2층으로 꾸민 옥선(屋船)으로, 갑판 중앙에 따로 지휘소인 2층 누각이 설치되어 있다. 상장을 높게 2층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였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ref>김재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9680 판옥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판옥선]]은 선체 위에 상장(上粧)을 꾸려 2층으로 꾸민 옥선(屋船)으로, 갑판 중앙에 따로 지휘소인 2층 누각이 설치되어 있다. 상장을 높게 2층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였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ref>김재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9680 판옥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그러나 해당 작품에서 [[이순신]]은 누각이 아니라 갑판 앞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으며, 포 역시 낮은 위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작품에서 [[이순신]]은 누각이 아니라 갑판 앞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으며, 포 역시 낮은 위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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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8일 (목) 00: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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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파일:민족기록화 일러 관련기사.jpg
김현승 일러스트레이터
대표명칭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정의

민족기록화 김기창-명량대첩 고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은 기사

내용

해당 작품에 그려진 전선(戰船)은 평선(平船)으로, 선체 안에 병사들이 발을 붙이고 싸울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에 갑판을 깔고, 배를 움직이기 위하여 여러 개의 노를 달아놓는 형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1]
그러나 실제 명량대첩때 크게 활약한 전선은 판옥선(板屋船)으로, 판옥선은 1555년(명종 10)때 만들어져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이미 125명 이상의 군사를 수용한 그 크기는 종전에 기껏 80명을 정원으로 한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며, 그 구조도 튼튼하였다.[2]

Quote-left.png 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Quote-right.png
출처: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 병술 2번째기사. 온라인 참조: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3]


판옥선은 선체 위에 상장(上粧)을 꾸려 2층으로 꾸민 옥선(屋船)으로, 갑판 중앙에 따로 지휘소인 2층 누각이 설치되어 있다. 상장을 높게 2층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였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4]
그러나 해당 작품에서 이순신은 누각이 아니라 갑판 앞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으며, 포 역시 낮은 위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김기창-명량대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선체 안에...형태" :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임진왜란 때에 이미...튼튼하였다." :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병술) 두번째 기사. 온라인 참조: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사료
  2. 웹 자원
    •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용한 정보

  1. 강신철,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작성일: 1980년 02월 26일.
  2. "전선(판옥선)", 한국의 배,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