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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 (김기창)의 전투는 장관이나 배의 동력에 관해선 불분명하다. 모두 깃발이 나부끼는데 노에 의존돼 있을 뿐 돛 (범)을 찾아볼 수도 없다. | 『명량대첩』 (김기창)의 전투는 장관이나 배의 동력에 관해선 불분명하다. 모두 깃발이 나부끼는데 노에 의존돼 있을 뿐 돛 (범)을 찾아볼 수도 없다. |
2017년 9월 27일 (수) 22:30 판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 |
대표명칭 |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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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민족기록화 김기창-명량대첩 고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은 기사
내용
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작품 속에 묘사된 전선(戰船)
『명량대첩』 (김기창)의 전투는 장관이나 배의 동력에 관해선 불분명하다. 모두 깃발이 나부끼는데 노에 의존돼 있을 뿐 돛 (범)을 찾아볼 수도 없다.
예복과 자결방식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있고, 왼손 근처에 작은 칼이 놓여져 있다.
그러나 실제 그의 자결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상반되는 의견들이 있는데, 당시 그의 최후를 목격했던 김우현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민영환은 한복차림으로 사망했고, 장도(粧刀)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그의 사망 현장 목격자 중 한 명인 시종무관 어담(魚潭)은 그가 오른손에 손톱 깎기만한 작은 칼을 쥔 채로 사망하였고, 할복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여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었다고 회고하였고, 민영환의 장남 민장식의 아들인 민병진도 그의 조부가 단도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다.
자결장소
작품에 묘사된 배경은 승려와 마당의 석등[1]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민영환이 순국 자결한 장소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시종무관 어담(魚潭)과 김우현 목사, 민병진의 회고에 따르면, 민영환의 집에 민영환의 어머니와 가족이 있었기에 자결 장소를 청지기였던 이완식의 집으로 택했으며, 그의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본저(本邸)로 옮겨졌기 때문에 자결한 당시 모습을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만 목격했다고 한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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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 김기창-명량대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석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단행본
- 조정래, 『아리랑 1: 조정래 대하소설』, 해냄, 2001, 235쪽.
-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291쪽.
- 기사
- 강신철,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작성일: 1980년 02월 26일.
- 김태완, "항일(抗日)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 후손들의 120년 영락", 『월간조선』, 작성일: 2015년 10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