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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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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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정보
|대표명칭 = 진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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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족기록화 유적 진주성 촉석루 전경.jpg
|DB유형 = 민족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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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민족기록화팀(2016년 11월 13일 촬영)
|이칭/별칭 = 晉州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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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진주성
|명칭 = 진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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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晉州城
|유형 =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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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성격 =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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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본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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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성곽
|관련 문화재 = 촉석루, 의기사, 창열사, 북장대,서장대, 영남포정사, 공북문, 호국사
+
|시대=조선시대
|image =진주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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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사적 제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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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1963년 0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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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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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김시민]],[[최경회]],[[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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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유물유적=
 
}}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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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진주는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 접경한 최전선에 위치하여 두 나라 간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다. 삼국이 통일 된 이후에도 진주는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한 기지로서 역할했다. 조선시대에도 경상도와 전라도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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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있는 성.<ref>"[h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두산백과.</ref>
  
진주성은 백제 때 건설되었으며 당시에는 거열성지(居烈城址), 산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강변 절벽 위에 성채가 만들어졌고 서쪽으로는 하천이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여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비하는 기지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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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4971&cid=40942&categoryId=33546 네이버백과사전, '진주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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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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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 접경한 최전선에 위치하여 두 나라 간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다. 삼국이 통일 된 이후에도 진주는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한 기지로서 역할했다. 조선시대에도 진주는 그 중요성이 높았으며 경상도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두산백과.</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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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은 백제 때 건설되었으며 당시에는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하며, 산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강변 절벽 위에 성채가 만들어졌고 서쪽으로는 하천이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두산백과.</ref>  
  
1591년(선조 24년)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고, 1592년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1593년 6월에는 왜군 10만 여명이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1604년에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으며,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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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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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9년(우왕 5)에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강주진장 배극렴이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때까지 토성이었던 [[촉석성]]을 석축으로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ref>정의도, "[http://jinju.grandculture.net/Contents?local=jinju&dataType=01&contents_id=GC00402149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진주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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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전인 선조 24년(1591)에는 영·호남의 읍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는데,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가 옛 성이 좁다고 하면서 동쪽을 넓혀 외성을 두었다. 1593년 이후에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이수일]](李守一)이 진영을 [[촉석성]]으로 옮기고, 김수가 쌓은 성이 너무 넓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성 안에 여러 시설을 두었다. 내성을 쌓고서 대홍문을 설치하였으며, 촉석과 관탕의 두 둔덕을 가로질러 동쪽과 북쪽에 홍문을 설치하였다.<ref>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909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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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패했을 때 옛 북문과 신북문, 남문에도 옹성을 축조하고 근대전에 적합하도록 내성에 이어 지금의 너비로 다시 쌓았다. 1605년(선조 38) 병사 이수일(李守一)이 진을 성 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였다. 1607년에는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포루 12개를 증축하였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08&index_id=cp02081100&content_id=cp020811000001&search_left_menu=1 진주성]", 문화원형라이브러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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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진주성은 1970년대에 진주성 정화사업을 거쳐 복원 정비된 것이다. 그 뒤에도 발굴이 진행되어 기록에 전하는 내부 시설이 일부 밝혀졌다. 특히 1999년에 진주성 공북문터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공북문 받침돌 아래에서 약 80㎝ 이상되는 판축층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에서는 저습지도 발견되었다.<ref>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909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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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진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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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성채를 보강하여 왜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1592년 9월 왜군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지만 김시민 장군에게 대패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두산백과.</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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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6월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을 잃게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2차 전투에서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왜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쳐들어갈 여력을 상실하였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일화가 유명하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두산백과.</ref>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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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3,01180000,38# 문화재청, '진주성']</ref>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강대운이 그린 진주성싸움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로 삼국시대에 처음 축성되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군관민들의 항쟁으로 왜군을 막아낸 곳이다.
 
1592년 진주목사 김시민이 제1차 진주성 전투 (10월5일~10월10일)에서 전라도로 진출하려던 왜군을 대파한 곳으로, 이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로 꼽힌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6만여명의 군관민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전사한 의병장 최경회의 후처인 논개는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의암에서 남강에 투신하였다.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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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노드 및 관계 테이블==
 
{| class="wikitable"
 
! 노드 || 관계 || 노드
 
|-
 
| [[진주성]] || ~의 배경이 되었다 || [[진주성싸움]]
 
|}
 
 
 
 
 
==참고==
 
 
<references/>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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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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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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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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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909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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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도, "[http://jinju.grandculture.net/Contents?local=jinju&dataType=01&contents_id=GC00402149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진주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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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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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08&index_id=cp02081100&content_id=cp020811000001&search_left_menu=1 진주성]", 문화원형라이브러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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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13,01180000,38 진주성]",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
  
[[분류:민족기록화]]
+
[[분류:민족기록화]][[분류:민족기록화 문화유산]]
[[분류:민족기록화 문화유산]]
 

2017년 9월 26일 (화) 16:44 판

진주성
(晉州城)
민족기록화팀(2016년 11월 13일 촬영)
대표명칭 진주성
한자표기 晉州城
유형 성곽
시대 조선시대
지정번호 사적 제118호
지정일 1963년 01월 21일
관련인물 김시민,최경회,논개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있는 성.[1]

내용

전략적 요충지

진주는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 접경한 최전선에 위치하여 두 나라 간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다. 삼국이 통일 된 이후에도 진주는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한 기지로서 역할했다. 조선시대에도 진주는 그 중요성이 높았으며 경상도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다.[2]
진주성은 백제 때 건설되었으며 당시에는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하며, 산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강변 절벽 위에 성채가 만들어졌고 서쪽으로는 하천이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3]

역사적 변천

1379년(우왕 5)에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강주진장 배극렴이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때까지 토성이었던 촉석성을 석축으로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4]
임진왜란 직전인 선조 24년(1591)에는 영·호남의 읍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는데,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가 옛 성이 좁다고 하면서 동쪽을 넓혀 외성을 두었다. 1593년 이후에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이수일(李守一)이 진영을 촉석성으로 옮기고, 김수가 쌓은 성이 너무 넓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성 안에 여러 시설을 두었다. 내성을 쌓고서 대홍문을 설치하였으며, 촉석과 관탕의 두 둔덕을 가로질러 동쪽과 북쪽에 홍문을 설치하였다.[5]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패했을 때 옛 북문과 신북문, 남문에도 옹성을 축조하고 근대전에 적합하도록 내성에 이어 지금의 너비로 다시 쌓았다. 1605년(선조 38) 병사 이수일(李守一)이 진을 성 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였다. 1607년에는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포루 12개를 증축하였다.[6]
지금의 진주성은 1970년대에 진주성 정화사업을 거쳐 복원 정비된 것이다. 그 뒤에도 발굴이 진행되어 기록에 전하는 내부 시설이 일부 밝혀졌다. 특히 1999년에 진주성 공북문터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공북문 받침돌 아래에서 약 80㎝ 이상되는 판축층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에서는 저습지도 발견되었다.[7]

임진왜란과 진주성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성채를 보강하여 왜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1592년 9월 왜군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지만 김시민 장군에게 대패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다.[8]
1593년 6월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을 잃게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2차 전투에서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왜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쳐들어갈 여력을 상실하였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일화가 유명하다.[9]

주석

  1. "[h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doopedia』online.두산백과.
  2. "진주성", 『doopedia』online.두산백과.
  3. "진주성", 『doopedia』online.두산백과.
  4. 정의도, "진주성", 『디지털진주문화대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길식, "진주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6. "진주성", 문화원형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7. 김길식, "진주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8. "진주성", 『doopedia』online.두산백과.
  9. "진주성", 『doopedia』online.두산백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김길식, "진주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의도, "진주성", 『디지털진주문화대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 "진주성", 『doopedia』online.두산백과.
    • "진주성", 문화원형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 "진주성",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