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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5일 (월) 10:30 판

일본 일요가 조선의 아버지에게

“천만 뜻밖의 친서를 받았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모두 무사하시고, 병고도 없이 오늘까지 몸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봉서를 뜯고 읽으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처음 붙잡힌 날부터 지금까지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28년간 매일 드린 기도의 응답이 아닐까 합니다. 저도 이 편지를 전하는 사람을 따라가서 아버님 어머님에게 달려가 절을 드리고 싶은 심정 간절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안고 살았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그날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보내주신 편지를 아침저녁으로 보고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분께서도 이 편지를 저라고 생각하시고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본 승려가 된 조선인 여대남

1620년 10월3일. 일본 구마모토 혼묘지(本妙寺) 주지 일요(日遙, 1580~1659)는 아직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며칠 전 봉투에 ‘조선국 하동에 사는 아버지 여천갑(余天甲)이 아들 여대남(余大男)에게 보냄’이라고 쓰인 편지를 받으면서부터다.

일요는 지난 27년간 단 하루도 아버지 어머니를 잊고 지낸 날이 없었다. 매일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향을 사르고 부처님에게 절을 올렸다. 때로는 자신이 무슨 죄가 있어서 오랜 세월 낯선 나라에서 지내야 하는지 한탄했다. 하지만 아무리 울거나 원망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눈을 뜨면 여전히 고향산천이 아닌 이역만리 일본이었다. 그럴수록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져갔다.

지난 며칠 간 일요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글 위에 가만히 손을 대면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일요는 그때까지 자신의 부모가 살아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군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직접 보았고, 자신의 고향도 그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음을 잘 알았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직접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네 어미와 나는 통곡하며 마주앉아 울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잘도 도망 오는데 내 아들 대남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필시 부모의 생존을 몰라 그런 것이리라. 그래서 어떻게든 네게 편지를 전하려 했으나 전달할 방도가 없었단다.’

부친 여천갑의 편지에는 아들의 생사를 몰라 밤낮으로 통곡하며 지냈던 일, 정미년(1607년)에 하동 출신 사행원이 일본에서 여대남을 만났다는 소식을 전해준 일, 지난 가을 조선으로 귀환한 하종남으로부터 여대남이 출가해 지금은 구마모토 혼묘지에 있음을 들은 일, 자신들은 눈물로 아들을 기다리는데도 아들은 어찌 그리 무심할 수 있는지, 꼭 돌아와 가업을 이어야한다는 등의 얘기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일요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조선의 산천, 그곳 하동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부모가 있음을 깨달았다. 일요는 언젠가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거듭 되뇌었다.

한시 한 구절로 달라진 운명

일요의 조선 이름은 여대남. 조선 하동의 유복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그가 일본에 끌려온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가 16만 대군으로 한반도를 침략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전투에 능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 전역을 장악해나갔다. 1593년 6월,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성 안에 있는 6만여 군민들을 무참히 살육했다. 그들은 다시 하동현, 삼가현, 단성현 등으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멀쩡한 사람은 끌고 가고 허약하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당시 13살이었던 여대남은 화를 피해 친척이 주지로 있는 인근 보현암에 숨었다. 그렇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해 7월, 왜군에게 붙잡힌 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끌려갔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자리였다. 설령 살더라도 평생 종노릇을 하거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노예로 팔려나가기 십상이었다. 그 순간 여대남은 붓을 들어 천천히 글을 써내려갔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산행(山行)’의 한 구절이었다.

‘홀로 깊은 산에 올라 돌길을 걸어가니(獨上寒山石逕斜) / 흰 구름이 피어오르는 곳에 인가가 있네(白雲生處有人家)’

적장 가토는 깜짝 놀랐다. 일본에서는 글을 아는 이들이 극히 적었다. 그렇기에 조선의 시골 소년이 시퍼런 칼날이 번득이는데도 한시를 써내려가는 모습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가토는 “이 아이는 범상하지 않다”며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주었다. 인재로 키워 자신의 영지에 필요한 인물로 써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여대남에게 놀란 것은 가토를 따라 종군한 일련종의 고승 일진(日眞)도 마찬가지였다. 사명당 유정과 깊은 인연이 있던 일진은 가토를 설득해 여대남이 출가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일요(日遙, 니치요)라는 법명을 주고 일본 최고의 불교대학인 교토 육조강원(六條講院)에 유학시켰다. 하동 출신 사행원이 일요를 만난 것도 육조강원에서 공부할 무렵이었다.

흔묘지 주지 일요가 받은 편지

일요는 강원을 졸업한 뒤에 계속 학문과 수행에 매진했고, 그의 이름이 널리 알져지기 시작했다. 1609년에는 혼묘지 초대주지였던 일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제3대 혼묘지 주지를 계승했다. 혼묘지는 가토가 세운 원찰로 큐슈 지역 최대의 사찰이었다.

일요는 혼묘지 주지를 맡은 뒤 10여년간 전법에 힘을 쏟았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폐허가 된 고향에 굳이 갈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부친의 편지를 받은 일요는 더 이상 갈등하지 않았다. 아무리 은사 일진의 은혜가 깊더라도 자신은 조선인이었고, 조국에서 부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뒤 일요는 아버지 여천갑에게 편지를 써내려갔다. 어떻게든 조선으로 건너가기 위해 노력할 터이니 부디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부친으로부터 답장이 온 것은 2년 뒤인 1622년이었다. 편지를 받아든 일요의 가슴은 미어졌다. 자신이 수십 년간 마음을 닦아온 수행자가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너와 헤어진 지 30여년 만에 편지를 받았다. 마치 너의 음성을 듣고, 너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기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슬픔과 기쁨에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60살 네 어미는 65살, 이제 목숨이 얼마나 남았겠느냐. 매일 밤이 되면 반드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한다. 살아생전 네 모습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여대남은 눈물로 편지를 읽어나갔다. 고향의 부모님이 얼마나 자신을 그리워하는지가 절절이 묻어났다. 부친은 조부가 왜군에 의해 부상을 당해 그것이 화근이 돼 돌아가셨고, 보현암 주지 스님도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여대남 일요

일요는 그간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고국의 연로한 부모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이 아니면 누가 부모를 섬기겠느냐고 호소했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선과 일본이라고 어찌 다르겠냐고 절규도 했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의 뒤를 이은 가토 다다히로는 일요의 요청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성의 신망을 얻는 승려가 떠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정치적 계산에서였다. 다다히로는 오히려 일요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편지까지 검열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일요의 절망은 깊어져갔다. 그는 부친에게 다시 편지를 써내려갔다. 자신이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편지도 자신이 키운 측근을 통해 몰래 보내며, 그런 탓에 성의의 징표가 될 수 있는 선물도 보낼 수 없음도 털어놓았다.

“30년간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한 마음이 통했는지 편지를 받자옵고 매일 몇 번이나 읽고 있자니 아버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하늘은 어찌하여 제게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것이며, 우리 부자의 가슴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천수를 누리시면서 기다려주십시오.”

그러나 일요의 편지는 끝내 조선의 부친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1632년 호소가와 다다토시가 가토 다다히로를 내쫓고 권력을 잡자 일요는 다시 그에게 귀국을 간절히 청했다. 하지만 새로운 권력자 또한 냉정히 거절했다. 일요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귀국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가슴에 맺힌 한을 불심으로 쓸어내리며 아픈 시간들을 보냈다. 일요는 세월이 흘러 고국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 짐작될 무렵부터 부모의 위패를 모시고 매일 극락왕생을 기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히젠(肥前) 시마바라(島原) 지역에 사찰을 창건해 법을 펼쳤던 일요는 훗날 ‘쇼닌(上人)’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1665년 2월, 일요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79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전쟁의 참혹함을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아들 일요와 아버지 여천갑. 이들 부자가 주고 받았던 편지 3통과 끝내 부치지 못한 일요의 편지 1통이 현재 혼묘지에 보관돼 있다.

참고자료

  •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국립진주박물관, 2010년)
  •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노성환, 일본어문학 제46집)
  • ‘사명당평전’(조영록, 한길사)
  • ‘임란판 어느 이산가족의 사연, 상·하’(경향신문, 1984.1.17, 1984.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