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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8일 (월) 23:11 판
공정책 (空頂幘) |
|
대표명칭 | 공정책 |
---|---|
한자표기 | 空頂幘 |
구분 | 관 및 쓰개 |
착용신분 | 왕세자, 왕세손 |
착용성별 | 남성 |
목차
정의
정수리[頂]가 비어 있는[空] 책[幘]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관례를 치르지 않은 왕세자나 왕세손이 평상시나, 의례를 위해 면복을 입을 때 착용한다.[1]
내용
한나라 이후 중국에서는 관례를 올리지 않은 황제, 황태자, 친왕 등이 공정흑개책(空頂黑介幘)[2]혹은 공정개책(空頂介幘)[3]을 썼다. 이를 참고로 조선 후기에 공정책을 만들었는데, 형태는 한나라의 개책(介幘)[4]과 달랐다. 조선의 공정책은 면관의 면판 부분을 없앤 형태와 신하들이 쓰던 양관에서 양이 있는 정수리 부분을 제거한 모양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공정(空頂)’[5]이라는 말이 갖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용어는 채택하고, 면관과 양관을 참작해 새로운 형태의 공정책을 만들었다.[6]
정수리가 비었다는 것은 미성년자(未成年者)임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정수리가 덮인 관모는 성인(成人)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아직 관례(冠禮)를 올리지 않은 미성년자가 정수리를 덮은 관모를 쓰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 조선의 왕세자는 아주 어린 나이에 책례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관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책례를 올릴 때 쓸 수 있는 관모가 필요했다. 1666년(현종 6)에 왕세자 책례에 착용하는 복식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인종의 사례를 근거로 면복으로 최종 결정하였는데, 관례를 올리지 않았을 경우의 머리 형태나 관모에 관해 중국의 사례를 들어 논의가 일어났다. 당대(唐代)의 『두씨통전』에서 황태자 책례시 원유관을 쓰지만 만일 아직 관례를 치루지 않았으면 쌍동계를 한다고 되어있어 숙종 책례시에 쌍동계만 하고 관모를 쓰지 않는 것과 그 위에 면관을 쓰는 문제에 관해 논의를 한 후, 최종적으로 쌍동계에 면관을 얹고 7장복을 갖추기로 한다.[7]
그러나 다음해, 헌종이 “왕세자 책례 때 쌍동계를 한다면 공정책을 써야하는데 왜 마련하지 않는지”를 묻자, 예조에서 지난해의 논의를 통해 쌍동계에 면관을 쓰는 것으로 결정하고 절목까지 마련했으며 공정책은 논의된 적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헌종은 공정책으로 의논해서 정했는데 예조의 초기를 보니 쌍동계만 있다고 하였다. 이에 공정책을 마련하게 하자는 의견제시해 유학에 조예가 깊고 문헌에 밝은 신하들로 하여금 『문헌통고』 등의 옛 문헌을 찾아 공정책의 형태를 고증하여 제작하게 하였다. 이 때 정해진 공정책의 형태는 조선의 관원이 조복과 제복을 입을 때 쓰는 양관에서 정수리를 없앤 형태로, 숙종의 왕세자 책례에는 쌍동계에 공정책을 착용하게 되었다. 1649년에 현종이 왕세손으로 책봉될 때 처음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형태에 관한 논의는 1667년 숙종의 왕세자 책례 때 이루어졌다.[8]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왕세자 | 공정책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왕세손 | 공정책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공정책 | 국립고궁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공정책 | 의궤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A ekc:mentions B |
왕세자의 대례복 | 공정책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649년 | 공정책이 만들어졌다 |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173쪽.
- ↑ 공정흑개책(空頂黑介幘): 정수리가 빈 검은색의 개책이다.(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173쪽 참조.)
- ↑ 공정개책(空頂介幘): 정수리가 빈 개책이다.(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173쪽 참조.)
- ↑ 개책(介幘): 관모의 일종으로, 머리둘레를 싸는 천에서 정수리가 있는 관모로 변한 형태의 한 종류이다.
- ↑ 공정(空頂): 정수리를 덮지 않는 관모를 착용하는 미성년자를 뜻한다.
-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173쪽.
- ↑ 최연우, 『숙종 왕세자 책례시의 공정책 디자이너』, 『장서각 소장 ‘의례등록(儀禮謄錄)’ 자료의 탈초, 역주 및 현대화』, 2015, 23~28쪽.
- ↑ 최연우, 『숙종 왕세자 책례시의 공정책 디자이너』, 『장서각 소장 ‘의례등록(儀禮謄錄)’ 자료의 탈초, 역주 및 현대화』, 2015, 23~28쪽.
- ↑ 최연우, 「숙종 왕세자 책례시의 공정책 디자이너」, 『장서각 소장 ‘의례등록(儀禮謄錄)’ 자료의 탈초, 역주 및 현대화』, 2015, 25쪽.
- ↑ 최연우, 『숙종 왕세자 책례시의 공정책 디자이너』, 『장서각 소장 ‘의례등록(儀禮謄錄)’ 자료의 탈초, 역주 및 현대화』, 2015, 25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2015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내과제 ‘고전자료의 현대화’ 연구결과발표회, 『장서각 소장 ‘의례등록(儀禮謄錄)’ 자료의 탈초, 역주 및 현대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5.
- 姜淳弟, 「우리 冠帽의 始末에 관한 硏究-男子 便服 冠帽를 中心으로-」, 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 李民周, 「朝鮮時代 王族冠帽에 關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 中國織繡服飾全集編纂委員會, 『中國織繡服飾全集』 4, 天津人民美術出版社, 2003.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 黃能馥, 陳娟娟, 『中華歷代服飾藝術』, 中國旅遊出版社, 1999.
- 황의숙 외3인, 『아름다운 한국복식』, 수학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