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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정조]]의 즉위=== | ||
+ | 1764년에 [[조선 영조]]는 할아버지에게서 손자로 직접 계승시키지 않고, [[효장세자]](진종)(孝章世子 眞宗)의 후사로 삼아 계승시켰다. 1774년에는 왕세손인 [[조선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1776년 3월 10일 [[조선 정조]]는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즉위하는 그날 [[조선 정조]]는 [[조선 영조]]의 뜻을 이어 [[효장세자]]를 추숭하도록 하고, 동시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종통도 중하지만 아버지의 은혜 또한 끊을 수 없는 것으로 그에 대해 보답하는 도리를 다하겠다고 선언했다.<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88 조선 영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규장각]]의 설치=== | ||
+ | [[조선 정조]]는 도덕적 능력과 실력을 겸비한 사대부들을 중용하고자 했다. 이같은 생각으로 [[조선 정조]]는 즉위년에 [[규장각]]을 설립하였다. [[창덕궁]] 후원에 터를 잡아 새로운 전각을 세우고 기왕의 [[홍문관]], [[예문관]], [[사헌부]], [[사간원]]이 가지고 있던 명예와 권한을 규장각 각신들에게 부여하였다. 규장각에는 당시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내외의 서적들을 고루 갖추어 놓고, 이를 연구하며 조선에 필요한 개혁의 방안을 내놓기를 기대했다. 젊은 신진 관료들을 선발하여 이들과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며, 실력이 있으면 가문이나 당파, 지역을 가리지 않고 발탁하여 필요한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또한 가장 보기 좋은 활자로 출판하여 조선의 문화적 수준을 과시했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88 조선 영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탕평책=== | ||
+ | 정조는 모든 사안에서 과거가 아닌 현재의 행적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 옳음에 승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당파 간의 갈등을 봉합해나갔다. | ||
+ | 정치적으로 가장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노론 뿐 아니라 숙종과 경종, 영조대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패퇴했다고 여겨지는 남인(南人), 소론(少論)들도 등용되어 경륜을 펼칠 수 있었다. [[서명선|서명선(徐命善)]], [[윤시동|윤시동(尹蓍東)]], [[김종수|김종수(金鍾秀)]], [[채제공|채제공(蔡濟恭)]] 등 다양한 정파의 인물들을 정승에 임명하였는데, 단지 당파를 아우르는데서 그치지 않고 각 정파에서 의리에 투철한 인물들을 등용하였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88 조선 영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문화정책==== | ||
+ | 정조의 시대는 기왕의 주자성리학 일변도의 학문에서 벗어나 북학(北學)이나 서학(西學) 등 새로운 학문을 통해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지식인들이 늘어났다. 정조가 중용한 [이가환|이가환(李家煥)]], [[정약용|정약용(丁若鏞)]] 등도 서학에 경도된 인물로 공격받기도 했다. 정조는 이런 문제들은 한때의 호기심 정도로 치부했다. 한편 사대부가에서 유희적 글쓰기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가졌고 [[문제반정]]을 시행하여 반성을 촉구했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88 조선 영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서얼과 중인의 등용===== | ||
+ | 정조는 서얼과 중인을 재주에 따라 등용하였다. [[이덕무|이덕무(李德懋)]], [[유득공|유득공(柳得恭)]], [[박제가|박제가(朴齊家)]] 등이 정조의 인재책에 의해 발탁되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88 조선 영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화성행궁]]의 설치=== | ||
+ |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장하면서 건설하기 시작한 도시였다. 정조는 1804년 즉 세자가 15세가 되는 때에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를 떠날 결심을 했는데, 이 때에 상왕이 머무를 행도로서 화성을 건설한 것이었다. 화성 성역을 감독하는 신하들에게 유시한 윤음. 축성 과정에서부터 비용을 줄이고 평지성이지만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곽 축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연구·적용시켰다.수원 일대에 상인들을 이주시키고, 이들이 상업을 통해 이주한 도시민들의 생업을 보조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농업 및 상업을 통해 도시의 자립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의 죽음으로 이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88 조선 영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저술과 편찬=== | ||
+ | 『[[일성록|일성록(日省錄)]]』, 『[[무예도보통지|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속오례의|속오례의(續五禮儀)]]』·『[[증보동국문헌비고|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국조보감|국조보감(國朝寶鑑)]]』·『[[대전통편|대전통편(大典通編)]]』·『[[문원보불|문원보불(文苑黼黻)]]』·『[[동문희고|동문휘고(同文彙考)]]』·『[[규장전운|규장전운(奎章全韻)]]』·『[[오륜행실|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을 편찬하였다. 이와 함께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해 뒷날 『[[홍재전서|홍재전서(弘齋全書)]]』(184권 100책)로 간행되도록 하였다. | ||
+ | 그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탁월한 학문적 능력으로 군사의 위상을 확보하여 문화국가를 통치한 것이다.<ref>정옥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867 ]",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그외의 정치활동=== | ||
+ |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 밖에도 [[장용영|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의 폐지, 『[[자휼전칙|자휼전칙(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의 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曆)의 제정 및 보급, [[신해통공|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ref>정옥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867 ]",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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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 관련 기여도(임시 제목)=== | ===복식 관련 기여도(임시 제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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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7일 (목) 01:29 판
정조(正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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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360px|thumb|center|]] | |
대표명칭 | 정조(正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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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역할 | 조선의 제22대 왕, 추존황제 |
이칭/별칭 | 자 형운(亨運) 휘 산(祘) 호 홍재(弘齋) 선황제(宣皇帝) |
재위기간 | 1776년 3월 10일-1800년 6월 28일(음) |
출생사망 | 1752년 9월 22일-1800년 6월 28일(음) |
능묘 | 건릉(健陵) 37.213759, 126.9869674 |
배우자 | 정비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 후궁 의빈 성씨(宜嬪 成氏 |
자녀 | 2남 2녀, 문효세자(文孝世子), 순조(純祖), 숙선옹주(淑善翁主) |
부친 | 생부 장조(莊祖) 법부 진종(眞宗) |
모친 | 생모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법모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 趙氏 |
전임자 | 순조(純祖) |
후임자 | 철종(哲宗) |
목차
정의
- 조선의 제22대 왕.
내용
조선 정조의 즉위
1764년에 조선 영조는 할아버지에게서 손자로 직접 계승시키지 않고, 효장세자(진종)(孝章世子 眞宗)의 후사로 삼아 계승시켰다. 1774년에는 왕세손인 조선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1776년 3월 10일 조선 정조는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즉위하는 그날 조선 정조는 조선 영조의 뜻을 이어 효장세자를 추숭하도록 하고, 동시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종통도 중하지만 아버지의 은혜 또한 끊을 수 없는 것으로 그에 대해 보답하는 도리를 다하겠다고 선언했다.[1]
규장각의 설치
조선 정조는 도덕적 능력과 실력을 겸비한 사대부들을 중용하고자 했다. 이같은 생각으로 조선 정조는 즉위년에 규장각을 설립하였다. 창덕궁 후원에 터를 잡아 새로운 전각을 세우고 기왕의 홍문관, 예문관, 사헌부, 사간원이 가지고 있던 명예와 권한을 규장각 각신들에게 부여하였다. 규장각에는 당시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내외의 서적들을 고루 갖추어 놓고, 이를 연구하며 조선에 필요한 개혁의 방안을 내놓기를 기대했다. 젊은 신진 관료들을 선발하여 이들과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며, 실력이 있으면 가문이나 당파, 지역을 가리지 않고 발탁하여 필요한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또한 가장 보기 좋은 활자로 출판하여 조선의 문화적 수준을 과시했다. [2]
탕평책
정조는 모든 사안에서 과거가 아닌 현재의 행적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 옳음에 승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당파 간의 갈등을 봉합해나갔다. 정치적으로 가장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노론 뿐 아니라 숙종과 경종, 영조대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패퇴했다고 여겨지는 남인(南人), 소론(少論)들도 등용되어 경륜을 펼칠 수 있었다. 서명선(徐命善), 윤시동(尹蓍東), 김종수(金鍾秀), 채제공(蔡濟恭) 등 다양한 정파의 인물들을 정승에 임명하였는데, 단지 당파를 아우르는데서 그치지 않고 각 정파에서 의리에 투철한 인물들을 등용하였다. [3]
문화정책=
정조의 시대는 기왕의 주자성리학 일변도의 학문에서 벗어나 북학(北學)이나 서학(西學) 등 새로운 학문을 통해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지식인들이 늘어났다. 정조가 중용한 [이가환|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도 서학에 경도된 인물로 공격받기도 했다. 정조는 이런 문제들은 한때의 호기심 정도로 치부했다. 한편 사대부가에서 유희적 글쓰기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가졌고 문제반정을 시행하여 반성을 촉구했다. [4]
서얼과 중인의 등용==
정조는 서얼과 중인을 재주에 따라 등용하였다.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이 정조의 인재책에 의해 발탁되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5]
화성행궁의 설치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장하면서 건설하기 시작한 도시였다. 정조는 1804년 즉 세자가 15세가 되는 때에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를 떠날 결심을 했는데, 이 때에 상왕이 머무를 행도로서 화성을 건설한 것이었다. 화성 성역을 감독하는 신하들에게 유시한 윤음. 축성 과정에서부터 비용을 줄이고 평지성이지만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곽 축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연구·적용시켰다.수원 일대에 상인들을 이주시키고, 이들이 상업을 통해 이주한 도시민들의 생업을 보조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농업 및 상업을 통해 도시의 자립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의 죽음으로 이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6]
저술과 편찬
『일성록(日省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속오례의(續五禮儀)』·『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국조보감(國朝寶鑑)』·『대전통편(大典通編)』·『문원보불(文苑黼黻)』·『동문휘고(同文彙考)』·『규장전운(奎章全韻)』·『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을 편찬하였다. 이와 함께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해 뒷날 『홍재전서(弘齋全書)』(184권 100책)로 간행되도록 하였다. 그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탁월한 학문적 능력으로 군사의 위상을 확보하여 문화국가를 통치한 것이다.[7]
그외의 정치활동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 밖에도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의 폐지, 『자휼전칙(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의 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曆)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8]
거행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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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지영, "조선 영조",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정옥자,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옥자,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