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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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안 뒤쪽 중앙부에 불단을 마련하여 아미타삼존불좌상(阿彌陀三尊佛坐像)을 봉안하였고, 그 뒷벽에는 1476년(성종 7)에 조성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측면 벽에도 조선 전기 작품으로 보이는 벽화들이 있었는데 해체 수리하면서 벽체 그대로 뜯어내 보존 전시하고 있다.[민백] | 건물 안 뒤쪽 중앙부에 불단을 마련하여 아미타삼존불좌상(阿彌陀三尊佛坐像)을 봉안하였고, 그 뒷벽에는 1476년(성종 7)에 조성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측면 벽에도 조선 전기 작품으로 보이는 벽화들이 있었는데 해체 수리하면서 벽체 그대로 뜯어내 보존 전시하고 있다.[민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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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 + |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1430년([[조선 세종|세종]] 12)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형식이다.[문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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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락보전 안의 벽화들==== | ||
+ |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문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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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 ||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문재] |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문재] | ||
− | 극락보전은 1934년 일제에 의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가 1962년 우리 정부에 의해 다시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 해체, 복원 공사 중 중앙 칸에서 발견된 명문(名文)에 따르면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조선 초기인 세종 12년(1430)에 효령대군이 지은 것이다. 또한 1950년 극락전 수리 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뒤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인 기문에 따르면 성종 7년(1476)에 후불벽화(後佛壁畵)가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를 대표할 만큼 뛰어난 아미타삼존좌상이 어느 때 조성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많은 벽화들을 1974년에 해체, 보수하다가 그 벽화들을 통째로 드러내 벽화 보존각을 지어 따로 보관하고 있다. | + | 극락보전은 1934년 일제에 의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가 1962년 우리 정부에 의해 다시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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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년 해체, 복원 공사 중 중앙 칸에서 발견된 명문(名文)에 따르면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조선 초기인 세종 12년(1430)에 효령대군이 지은 것이다.[신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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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1950년 극락전 수리 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뒤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인 기문에 따르면 성종 7년(1476)에 후불벽화(後佛壁畵)가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신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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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전기를 대표할 만큼 뛰어난 아미타삼존좌상이 어느 때 조성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많은 벽화들을 1974년에 해체, 보수하다가 그 벽화들을 통째로 드러내 벽화 보존각을 지어 따로 보관하고 있다.[신정일] | ||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 선비 같은 무위사의 극락보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다음생각) |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 선비 같은 무위사의 극락보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다음생각) | ||
− |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이 사찰의 4번째 중건인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이 극락전만은 1956년경의 수리공사 때 본존(本尊) 뒷벽의 벽화 명문(銘文)에서 “十二年 丙申 三月初 吉畵成”이란 기록을 통하여 적어도 1476년(성종 7)보다 앞서는 건물임이 밝혀졌다 | + |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이 사찰의 4번째 중건인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이 극락전만은 1956년경의 수리공사 때 본존(本尊) 뒷벽의 벽화 명문(銘文)에서 “十二年 丙申 三月初 吉畵成”이란 기록을 통하여 적어도 1476년(성종 7)보다 앞서는 건물임이 밝혀졌다.[두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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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7년 8월 28일 (월) 17:38 판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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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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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
영문명칭 | Geungnakbojeon Hall of Muwisa Temple, Gangjin |
지정번호 | 국보 제13호 |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소장처 | 강진 무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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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無爲寺)에 있는 조선 전기의 불전.
내용
무위사에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1555년(명종 10) 4창할 때 건립된 것인데, 이 극락전만큼은 1956년경 수리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뒷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인 연기문(緣起文)을 통하여 1476년(성종 7) 이전에 지어진 건물임이 밝혀졌다.
건물 안 뒤쪽 중앙부에 불단을 마련하여 아미타삼존불좌상(阿彌陀三尊佛坐像)을 봉안하였고, 그 뒷벽에는 1476년(성종 7)에 조성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측면 벽에도 조선 전기 작품으로 보이는 벽화들이 있었는데 해체 수리하면서 벽체 그대로 뜯어내 보존 전시하고 있다.[민백]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1430년(세종 12)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형식이다.[문재]
극락보전 안의 벽화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문재]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문재]
극락보전은 1934년 일제에 의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가 1962년 우리 정부에 의해 다시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신정일]
1983년 해체, 복원 공사 중 중앙 칸에서 발견된 명문(名文)에 따르면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조선 초기인 세종 12년(1430)에 효령대군이 지은 것이다.[신정일]
또한 1950년 극락전 수리 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뒤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인 기문에 따르면 성종 7년(1476)에 후불벽화(後佛壁畵)가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신정일]
조선 전기를 대표할 만큼 뛰어난 아미타삼존좌상이 어느 때 조성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많은 벽화들을 1974년에 해체, 보수하다가 그 벽화들을 통째로 드러내 벽화 보존각을 지어 따로 보관하고 있다.[신정일]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 선비 같은 무위사의 극락보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다음생각)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이 사찰의 4번째 중건인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이 극락전만은 1956년경의 수리공사 때 본존(本尊) 뒷벽의 벽화 명문(銘文)에서 “十二年 丙申 三月初 吉畵成”이란 기록을 통하여 적어도 1476년(성종 7)보다 앞서는 건물임이 밝혀졌다.[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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