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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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년(현종 2)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던 중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그 해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평양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1030년 다시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
 
1011년(현종 2)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던 중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그 해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평양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1030년 다시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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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년중(統和年中)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 다능(多能)을 비루(鄙陋)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통화년중(統和年中)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 다능(多能)을 비루(鄙陋)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대중상부(大中祥符) 10년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란 법호를 증사(贈賜)받았고, 천희(天禧) 5년 호경(鎬京) 중흥사(重興寺)에서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국사께서 법을 설하시니, 그 법의 혜택이 화택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청량(淸凉)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비의 등불을 혼구(昏衢)의 밤거리에 비추어 축건(竺乾)의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깨닫게 하였다. 국사가 매일 한 번씩 기자(箕子)의 고도(古都)를 일컬으면 대중은 세 번씩 창송하였다. 그 후 기숙(耆宿)인 선공(先公)의 사회사소(社會詞疏)가 문리(文理)가 맞지 아니함을 보고 고쳐 지어주면서 (결락) 도(道). 지만적(枝蔓的)인 부사(浮辭)는 잘라 버렸다.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게 되었으니, 혜거(惠璩)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 담빙(曇憑)의 음운학(音韻學)의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연(遒姸)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그를 적대(的對)할 수 있겠는가! 태평년중(太平年中)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진정(進呈)하고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란 법호를 올리고는 수다사(水多寺)를 맡도록 하였다. 태평(太平) 10년에 이르러 현종이 칙명으로 해안사(海安寺)로 이주하도록 앙청(仰請)하였다.  
 
대중상부(大中祥符) 10년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란 법호를 증사(贈賜)받았고, 천희(天禧) 5년 호경(鎬京) 중흥사(重興寺)에서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국사께서 법을 설하시니, 그 법의 혜택이 화택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청량(淸凉)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비의 등불을 혼구(昏衢)의 밤거리에 비추어 축건(竺乾)의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깨닫게 하였다. 국사가 매일 한 번씩 기자(箕子)의 고도(古都)를 일컬으면 대중은 세 번씩 창송하였다. 그 후 기숙(耆宿)인 선공(先公)의 사회사소(社會詞疏)가 문리(文理)가 맞지 아니함을 보고 고쳐 지어주면서 (결락) 도(道). 지만적(枝蔓的)인 부사(浮辭)는 잘라 버렸다.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게 되었으니, 혜거(惠璩)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 담빙(曇憑)의 음운학(音韻學)의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연(遒姸)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그를 적대(的對)할 수 있겠는가! 태평년중(太平年中)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진정(進呈)하고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란 법호를 올리고는 수다사(水多寺)를 맡도록 하였다. 태평(太平) 10년에 이르러 현종이 칙명으로 해안사(海安寺)로 이주하도록 앙청(仰請)하였다.  

2017년 8월 27일 (일) 15:49 판

해린(海麟)
BHST Monk1.png
대표명칭 해린
한자 海麟
생몰년 984년(성종 3)-1067년(문종21)
시호 지광(智光)
해린(海麟)
탑호 현묘(玄妙)
거룡(巨龍)
성씨 원씨(元氏)
속명 수몽(水夢)
출신지 강원 원주
승탑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승탑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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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는 해린(海麟), 자는 거룡(巨龍), 속성은 원씨(元氏),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으며 원주(原州) 출신이다.

...(중략)...

아버지의 휘는 휴(休)이니 관직은 아관(衙官)에 이르렀는데, 모든 사람들이 선연(先掾)들보다 뛰어난 관리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부터 훌륭한 상황(床喤)의 아들 낳기를 염원하여 항상 초연(椒衍)의 시(詩) 듣기를 원하였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니 영리함은 제호(提壺)에 계합하고 공손함은 거안(擧案)보다 더 얌전하였다. 끝없는 원력(願力)은 광목부인(光目婦人)과 같고 용모의 아름다움은 묘안(妙顔)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성선(聖善)의 태몽에 하해(河海)의 물이 맑게 범렴(泛瀲)하고 정천(井泉)에서는 물이 솟아 올랐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고는 일과로 탄기(呑氣)를 행하여 태아를 교육하였다. 이에 미루어 보면 어찌 발자취를 밟고 잉태하여 태어난 강원(姜嫄)을 부러워하겠는가? 탁태(託胎)할 때에는 그윽히 왕소(王邵)의 경우와 같았다. 이미 만삭이 되어서는 드디어 그 상서(祥瑞)를 발(發)하였다. 옹희(雍熙) 원년(元年) 세재(歲在) 알봉군탄년(閼逢涒灘年) 도월(涂月) 그믐날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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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가수행

이수겸(李守謙)에게 수업하다가 출가의 뜻을 품고 법천사(法泉寺)관웅(寬雄)을 찾아가 수업하였다. 관웅을 따라 상경, 개경해안사(海安寺)준광(俊光)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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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齠年)의 나이에 이르러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이수겸(李守謙)을 찾아가서 학업을 청하였다. 수겸(守謙)이 스님을 보고 특이한 그릇인줄 알고 말하기를, “나는 석학(碩學)이 될 기량(器量)을 지도할 능력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밝은 스승을 찾도록 노력하라.” 하였다. 어느 날 관상을 잘 보는 한 노인이 있어 스님의 손금을 보고 국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앞으로 통인달사(通人達士)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 다만 도주(道籌)에 종사할 생각에만 골똘히 잠기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장(老莊)의 개설(槪說)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헌면(軒冕)을 치수(錙銖)처럼 보고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마치 강비(糠秕)와 같이 여겼다. 급히 서둘러 법고사(法皐寺)의 관웅대사(寬雄大師)의 처소로 가서 수학하던 중 관웅(寬雄)스님이 경화(京華)인 개성으로 떠났으므로 국사도 그 산중(山中)을 하직하고 떠나게 되었다. 관웅대사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오운산(五雲山)을 벗어나자마자 스님은 곧 걸망을 짊어지고 따라갔다.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함께 연하(輦下)로 돌아갔다. 이어 곧 산의 서쪽을 점지(占地)하였는데 해안사(海安寺)와 선접(旋接)한 곳이었다. 준광방장(俊光方丈)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수도(修道)하면서 함장(函杖)에게 욕의(縟儀)를 펴고 시봉하기를 희망하며 정성을 다하여 표질(縹帙)을 관화(貫花)에서 연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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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관웅에게 유식학(唯識學)을 수업하였는데, 해린은 관웅이 지어준 법호이다. 999년(목종 2)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001년에는 숭교사(崇敎寺)의 개창과 함께 명성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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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영특함을 알게 된 웅공(雄公)은 기꺼워하면서 해린(海潾 : 潾은 麟의 오자)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통화(統和) 17년 수하(首夏)의 달에 용흥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품수(稟受)하였다. 탐·진·치의 마음을 씻어 그 오염(汚染)을 여의었으니 마치 손으로 공중(空中)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29살 때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할 때 감독을 맡았던 은공(恩功)으로 그 절의 초대(初代) 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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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활동

자운사(慈雲寺)의 법회에 참석한 뒤, 관웅이 있던 법천사로 옮겨 수업하였다. 1004년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된 대선(大選)에 급제, 대덕(大德)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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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21세 때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의 말은 평범하나 그 뜻은 매우 심오하였다. 시험의 문제는 같았으나 국사의 답안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이하였다. 저들 자신의 답안이 틀려서 자신의 소망에 어긋난 자들은 마치 소경이 촛불을 잡은 것과 같았으며, 혹은 시기하여 머트럽게 다투던 자들은 마치 함장(銜杖)한 것과 같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마음에는 모든 반연을 쉬었으니 감히 파도가 물에 의지한 것을 탄식할 것이며, 진여법(眞如法)은 모든 움직임을 여의었으니 마땅히 탁약(槖籥)의 가풍(假風)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토의하는 광장(廣場)에서는 주위로부터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으나 마치 교범파제(憍梵婆提 : gavāṃpati) 등의 호부장자(豪富長者)들로 구성된 그룹의 첩벽(疊壁)이 무너지고 모두 논리에 강복(降伏)하고 부처님께로 귀화한 것과 같았으며 견고한 인욕의 갑옷이여! 니건자(尼乾子)를 비롯한 외도(外道) 육사(六師)들의 일(一)·이(異)·유(有)·무(無) 등의 교란적인 주장이 부처님 사자후(獅子吼)의 일성으로 말미암아 모두 사라진 것과 같았다. 국사께서 법상(法床)에 앉아 불자(拂子)를 잡고 좌우로 한번 휘두르니 가히 청중들이 많이 모여 앉은 걸상이 부러진 것과 같았다. 임금이 국사의 도덕을 찬양하고 대덕(大德)의 법계를 서증(署贈)하였다. 이 때 스님께서 이르기를, “내가 의룡(義龍)과 서성(瑞聖)인 후배에게는 부끄럽지만 인수(仁獸) 보다는 앞서기를 기대하므로 인자(麟字)를 인(鱗)으로 이름을 고치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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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년(현종 2)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던 중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그 해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평양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1030년 다시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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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년중(統和年中)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 다능(多能)을 비루(鄙陋)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대중상부(大中祥符) 10년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란 법호를 증사(贈賜)받았고, 천희(天禧) 5년 호경(鎬京) 중흥사(重興寺)에서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국사께서 법을 설하시니, 그 법의 혜택이 화택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청량(淸凉)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비의 등불을 혼구(昏衢)의 밤거리에 비추어 축건(竺乾)의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깨닫게 하였다. 국사가 매일 한 번씩 기자(箕子)의 고도(古都)를 일컬으면 대중은 세 번씩 창송하였다. 그 후 기숙(耆宿)인 선공(先公)의 사회사소(社會詞疏)가 문리(文理)가 맞지 아니함을 보고 고쳐 지어주면서 (결락) 도(道). 지만적(枝蔓的)인 부사(浮辭)는 잘라 버렸다.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게 되었으니, 혜거(惠璩)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 담빙(曇憑)의 음운학(音韻學)의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연(遒姸)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그를 적대(的對)할 수 있겠는가! 태평년중(太平年中)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진정(進呈)하고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란 법호를 올리고는 수다사(水多寺)를 맡도록 하였다. 태평(太平) 10년에 이르러 현종이 칙명으로 해안사(海安寺)로 이주하도록 앙청(仰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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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남윤, 「고려 전기의 법상종과 해린」, 『강원불교사연구』, 소화, 1996.
  • 한국불교연구원, 「고려시대의 원주불교」,『원주 불교와 유적』, 원주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