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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글팀_병인양요_01_병인양요_양헌수_송건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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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42 병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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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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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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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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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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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초에 [[흥선대원군|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 박해 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3명 중, [[리델|리델(Ridel)]]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벨로네(Bellonett, H.D., 伯洛內)]]는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조선이 [[병인사옥|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청국 정부를 규탄하였다. 조선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로즈제독에게 응징 원정을 결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朝貢國)이지만 정치적으로 독립국가이며, 공범 사실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면서 거병(擧兵)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 관계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프랑스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 사령관인 [[로즈]]의 주재 하에 군사적 응징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42 병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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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의 진행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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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과 조선 정부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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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이었다.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 정찰과 수로 탐사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최선일(崔善一)]]·[[최인서|최인서(崔仁瑞)]]·[[심순녀|심순녀(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 보복의지를 보였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정부는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해 출정하게 하였다. [[양헌수]]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다가 천총에 임명되어,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42 병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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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패배와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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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문수산성(文殊山城)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프랑스군의 총포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관리·군인·백성이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때 [[양헌수]]는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작전(奇兵作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잠도작전|잠도작전(潛渡作戰)]]을 전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정족산성(鼎足山城)]]을 점거하였다. 드디어 11월 7일, 프랑스군대가 눈치 채지 못한 가운데 549명의 군대가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양헌수는 정족진을 결성한 뒤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김기명(金沂明)]] 지휘 하의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 [[이렴|이렴(李濂)]] 지휘 하의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 [[이대흥|이대흥(李大興)]] 지휘 하의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가 [[정족산성]]에 농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올리비에|올리비에(Ollivier)]]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야포 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조선군이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족산성]]에서의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정족산성승첩|정족산성승첩(鼎足山城勝捷)]]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화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 연패를 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해 근대식 병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정족산성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42 병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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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의 철수화 [[병인양요]] 이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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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결과에 대한 프랑스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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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 수교 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 개항을 위한 입약협상(立約協商)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 둘째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 셋째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 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 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원정을 성공이라고 간주하였다. 가령, 미국정부가 1867년 3월,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 프랑스는 [[병인사옥]]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으니 대조선미불공동원정을 제의하였을 때, 프랑스정부는 이미 조선 원정을 통해 응징 보복을 했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공동 원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한 예를 들 수 있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42 병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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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가 끝난 직후 조선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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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이 퇴각한 이후 조선은 서양의 재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개편하는 등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군이 서강(西江)까지 침입하여 우리의 강물이 더럽혀진 것은 [[천주교도]] 때문이었으니, 그들의 피로 더럽혀진 것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하면서 양화진 근처(오늘의 절두산(切頭山))에 새로운 형장을 만들어 1871년까지 [[천주교도]]들을 처형하였다. 또한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서구열강과의 통상 및 교류를 거부하였다. <ref>장정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15 병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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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글팀_병인양요_04_병인양요_강화_삼랑성_남문과_종해루.jpg | 강화도 삼랑성 나문과 종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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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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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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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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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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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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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욱, 「丙寅洋擾 전후 申櫶의 대내인식과 개혁론」, 『한국사학보』, Vol 42, 2011, 169-199쪽.
 +
**임재찬, 「丙寅洋擾와 朝鮮政府의 江華島 守備戰略과 戰術」, 『新羅學硏究』, Vol 8, 2004, 123-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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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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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42 병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장정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15 병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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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4일 (목) 11:48 판

병인양요(丙寅洋擾)
김원모, "병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병인양요
한자표기 丙寅洋擾
이칭 병인사옥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866년 9월 18일-1866년 11월 21일
관련인물 흥선대원군 양헌수 로즈 리델
관련장소 강화도



정의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

내용

병인양요의 배경

1866년 초에 대원군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 박해 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3명 중, 리델(Ridel)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 H.D., 伯洛內)는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조선이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청국 정부를 규탄하였다. 조선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로즈제독에게 응징 원정을 결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朝貢國)이지만 정치적으로 독립국가이며, 공범 사실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면서 거병(擧兵)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 관계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프랑스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 사령관인 로즈의 주재 하에 군사적 응징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1]

병인양요의 진행 상황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과 조선 정부의 대응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이었다.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 정찰과 수로 탐사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최인서(崔仁瑞)·심순녀(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 보복의지를 보였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정부는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해 출정하게 하였다. 양헌수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다가 천총에 임명되어,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였다.[2]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패배와 철수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文殊山城)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프랑스군의 총포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관리·군인·백성이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때 양헌수는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작전(奇兵作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잠도작전(潛渡作戰)을 전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점거하였다. 드디어 11월 7일, 프랑스군대가 눈치 채지 못한 가운데 549명의 군대가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양헌수는 정족진을 결성한 뒤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金沂明) 지휘 하의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 이렴(李濂) 지휘 하의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 이대흥(李大興) 지휘 하의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가 정족산성에 농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올리비에(Ollivier)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야포 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조선군이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족산성에서의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정족산성승첩(鼎足山城勝捷)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화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 연패를 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해 근대식 병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정족산성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3]

프랑스군의 철수화 병인양요 이후 상황

병인양요 결과에 대한 프랑스의 인식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 수교 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 개항을 위한 입약협상(立約協商)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 둘째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 셋째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 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 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원정을 성공이라고 간주하였다. 가령, 미국정부가 1867년 3월,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 프랑스는 병인사옥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으니 대조선미불공동원정을 제의하였을 때, 프랑스정부는 이미 조선 원정을 통해 응징 보복을 했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공동 원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한 예를 들 수 있다.[4]

병인양요가 끝난 직후 조선의 움직임

프랑스군이 퇴각한 이후 조선은 서양의 재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개편하는 등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군이 서강(西江)까지 침입하여 우리의 강물이 더럽혀진 것은 천주교도 때문이었으니, 그들의 피로 더럽혀진 것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하면서 양화진 근처(오늘의 절두산(切頭山))에 새로운 형장을 만들어 1871년까지 천주교도들을 처형하였다. 또한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서구열강과의 통상 및 교류를 거부하였다. [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병인양요 흥선대원군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66년
병인양요 천주교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66년
천주교도 리델 A는 B를 포함한다
천주교도 최선일 A는 B를 포함한다
천주교도 최인서 A는 B를 포함한다
천주교도 심순녀 A는 B를 포함한다
병인양요 강화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벨로네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로즈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66년
병인양요 이경하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66년
병인양요 이용희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66년
병인양요 양헌수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문수산성전투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66년
병인양요 정족산성승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66년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병인양요 A는 B를 언급하였다 1881년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1881년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에서 병인양요를 언급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752453 126.485935 프랑스군이 강화유수부를 공격하면서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김원모, "병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원모, "병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원모, "병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원모, "병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장정수, "병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최진욱, 「丙寅洋擾 전후 申櫶의 대내인식과 개혁론」, 『한국사학보』, Vol 42, 2011, 169-199쪽.
    • 임재찬, 「丙寅洋擾와 朝鮮政府의 江華島 守備戰略과 戰術」, 『新羅學硏究』, Vol 8, 2004, 123-139쪽.

유용한 정보

  • 김원모, "병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장정수, "병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