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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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1일 (월) 22:35 판

홍척(洪陟)
BHST Monk1.png
대표명칭 홍척
한자 洪陟
생몰년 미상-미상
시호 증각(證覺)
홍직(洪直)
법호 난원(爛圓)
탑호 응료(凝寥)
이칭 실상화상(實相和尙), 남한조사(南韓祖師)
승탑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승탑비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홍척(洪陟)은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로, 당 나라에 가서 마조(馬祖)의 제자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고 826년(흥덕왕 1)에 귀국하여 지리산에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하고 선풍(禪風)을 일으켰다.[1]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의 비문에서 "북산(北山)에는 도의(道義)요 남악에서는 홍척"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826년(흥덕왕 1)에 귀국한 홍척보다 5년 앞서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한 도의는 설악산을 근거로 하여 신라의 북방에서 선법을 펴고 있었고, 홍척은 남쪽인 지리산에 자리잡고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2]

Quote-left.png 조각배를 타고 중국에 건너가 불법을 구하며 도에 융합한 자들이 나왔다. 그러한 걸출한 선배 고승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그런 이들이 많았다. 혹은 명검(名劍)이 연진(延津)에서 변화하듯 하고, 혹은 진주(珍珠)가 합포(合浦)로 돌아오듯 하였는데, 거벽(巨擘)이 된 이들을 손가락으로 꼽으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 그대로 머문 자들로는 정중(靜衆)의 무상(無相)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을 들 수 있는데 선보(禪譜)에 나온 익주(益州)의 김(金)과 진주(鎭州)의 김(金)이란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동방으로 귀환한 자들로는 앞에서 소개한 북산(北山)의 의(義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척(陟 홍척(洪陟))을 비롯해서 그 뒤에 나온 태안(太安)의 철(徹 혜철(慧徹))과 국사(國師)인 혜목(慧目)의 육(育 현육(玄育))과 지력(智力)의 문(聞)과 쌍계(雙溪)의 조(照 혜조(惠照))와 신흥(新興)의 언(彦 충언(沖彦))과 용암(涌巖)의 체(體)와 진구(珍丘)의 휴(休 각휴(覺休))와 쌍봉(雙峯)의 운(雲 혜운(惠雲))과 고산(孤山)의 일(日 품일(品日))과 양조(兩朝)의 국사(國師)인 성주(聖住)의 염(染 무염(無染))과 보리(菩提)의 종(宗 광종(廣宗)) 등이다.

이들은 덕이 깊어서 중생의 어버이가 되고 도가 높아서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이름에서 도망쳐도 이름이 나를 따라오고 명성에서 도피해도 명성이 나를 쫓아온다고 한 격이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이 세상에 교화가 미쳤고 큰 비석에 업적이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동기들도 훌륭하고 제자들도 번창해서 선정(禪定)의 숲이 계림(雞林)에서 빼어나게 돋보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의 물결이 접수(鰈水 동해)로 안온히 흐르게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지증 화상 비명 병서(智證和尙碑銘 竝序)", 고운집 제3권 비(碑),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또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1에 홍척의 법통을 이은 이로 흥덕대왕선강태자(宣康太子)가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왕족의 귀의를 받아 선풍을 크게 드날렸음을 알 수 있다. 문하에 수철(秀澈)이 있어 실상산문을 크게 일으켰다.[3]

시호는 증각(證覺), 탑명은 응료(凝寥)이다. 탑과 비는 실상사에 있으며, 각각 보물 제38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과 보물 제39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으로 지정되었다.[4] 탑비의 비신(碑身)은 결실되어 비문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홍척의 구체적인 행적을 알 수가 없다.

시각자료

갤러리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홍척 A는 B를 위한 비이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홍척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실상산문 홍척 A는 B가 개창하였다
남원 실상사 홍척 A는 B가 창건하였다
지장 홍척 A는 B의 스승이다
홍척 신라 흥덕왕 A는 B의 스승이다
홍척 선강태자 김충공 A는 B의 스승이다
홍척 수철 A는 B의 스승이다
홍척 도의 A는 B와 관련있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홍척 A는 B를 기록하였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26년 홍척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남원 실상사를 창건하였다.

각주

  1.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홍척",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김영길, "홍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영길, "홍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강정만, "홍척", 『디지털남원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홍척",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김영길, "홍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강정만, "홍척", 『디지털남원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증 화상 비명 병서(智證和尙碑銘 竝序)", 고운집 제3권 비(碑),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