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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0일 (일) 23:35 판
서유문(徐有聞) | |
대표명칭 | 서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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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徐有聞 |
생몰년 | 1762-1822 |
본관 | 달성(達城) |
자 | 학수(鶴叟) |
부 | 서직수(徐直修) |
모 | 조영극(趙榮克)의 딸 |
정의
서유문(徐有聞, 1762-1822)은 조선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학수(鶴叟). 서종엽(徐宗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명인(徐命仁)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서직수(徐直修)이다. 어머니는 조영극(趙榮克)의 딸이다.
관직할동
서유문의 관직생활은 수차례 유배와 제직, 복관을 반복하는 등 평탄치 않았다. 1787년(정조 11)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91년에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이인채(李寅采)로부터 역적의 후손 조수민(趙秀民)을 가주서(假注書)로 천거했다 하여 탄핵을 받고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그 해 다시 홍낙유(洪樂遊)와 함께 조흘강(照訖講: 과거에 응시한 유생들을 성균관에서 호적을 대조한 뒤 『소학』을 강론하게 하던 제도)의 적간사관(摘奸史官)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조흘강의 시관(試官)인 윤영희(尹永僖)와 불미스러운 일로 서로 다투다가 제천현(堤川縣)에 유배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풀려났다. 1794년에 별겸춘추(別兼春秋)로 있을 때 예문관검열을 추천하는 자리에서 정조에게 오주(誤奏: 그릇되게 견해를 올림)를 하여 다시 삭직당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다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임명되었으나, 이응혁(李應爀)을 중비(中批: 전형을 거치지 않고 왕의 특지로 임명하는 것)로 부총관(副摠管)에 임명함은 부당하다는 차자(箚子)를 올려 또다시 창녕현(昌寧縣)에 유배되었다가 두 달만에 풀려났다. 그 뒤 통례(通禮)·승지(承旨) 등을 역임하다가 1800년에 순조가 즉위하자, 사헌부로부터 역적 김이재(金履載)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위원군(渭原郡)에 정배되었다. 1811년(순조 11) 대사간에 임명된 뒤 충청감사·이조참의·의주부윤·평안감사 및 사옹원(司饔院)의 감선제조(監膳提調) 등을 역임하면서 천릉도감(遷陵都監)에서 일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 1822년에는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1]
사행과 연행록
1798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이듬해에 귀국, 한글로 된 기행문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을 저술하였다.[2]
- 연행록을 저술하다
서장관(晝狀官)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의 견문(見聞) · 경과사(經過事) · 감상(感想)을 6권에 걸쳐 상세히 적은 기행문으로,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보다 17년 뒤에 나왔다. 이 작품의 특색은 한문으로 된 다른 기행문에 비하여 한글로 씌어졌다는 점이다.[3]
시각자료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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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