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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가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자 다시 노론·소론간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결국, 소론 일파가 제거되고 그와 그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追奪)되었다.
 
그가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가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자 다시 노론·소론간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결국, 소론 일파가 제거되고 그와 그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追奪)되었다.
  
저서로는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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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로는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ref>이동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83 윤증]",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8월 17일 (목) 16:09 판

윤증(尹拯)
대표명칭 윤증
한자표기 尹拯
영문명칭 Yoon jeung
생몰년 1629년-1714년
본관 파평(坡平)
시호 문성(文成)
명재(明齋), 유봉(酉峰)
자인(子仁)
출생지 서울
시대 조선시대
국적 조선
대표저서 명재유고(明齋遺稿), 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
윤선거(尹宣擧)



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

내용

개요

윤증(尹拯, 1629-1714)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이며, 호는 명재(明齋), 유봉(酉峰)이다.[1]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 李氏)로 장백(長白)의 딸이다.[2] 윤증은 18세 때인 1647년(인조 25) 10월에 안동 권씨의 딸과 혼인했다.[3]

활동

그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는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를 세워 학자들과 담론하고, 여동래와 함께 『근사록』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하여 거상 중에 강학(講學)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자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하여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1680년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그를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했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 때 박세채(朴世采)가 그를 초빙하여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번 초빙되고,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사정 이외에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옹(尤翁: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삼척(三戚: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閔鼎重)의 집안)의 문호(門戶)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세채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권하지 못했다.

최신(崔愼)이 송시열을 변무(辨誣)하는 것을 핑계로 그의 서신을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하였으며, 또 상신 김수항·민정중 등도 그가 사감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상주하였다. 이로부터 선비 간에 논의가 비등하게 일어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송시열을 지지하는 자는 노론이 되고 그를 지지하는 자는 소론이 되었다.

그가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아버지 선거가 그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그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다. 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보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 주려 하였다. 또한 윤휴(尹鑴)와 예송 문제(禮訟問題)로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과 화해시키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은 선거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가진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선거가 죽은 후 1673년(현종 14) 그는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강도(江都)의 일(병자호란 때 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선거만 진원군(珍原君)의 종자(從者)가 되어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는데 자기는 선거에 대해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해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하였다.

그는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고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만 수정하고 글의 내용은 고쳐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그는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하고, 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覇幷用)’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초년에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하여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이 궐기하여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의 태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교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을 전후하여 사림과 간관 사이에 비난과 변무의 상소가 계속되고, 양파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집의김일기(金一夔) 등의 상소로 관작이 일시 삭탈되었다가 중전 복위를 즈음하여 숙종의 특명으로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사간정호(鄭澔) 등이 다시 상소하여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었으나 숙종은 정호를 벌주며,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의 욕됨을 받는 그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그가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가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자 다시 노론·소론간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결국, 소론 일파가 제거되고 그와 그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追奪)되었다.

저서로는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4]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윤선거 윤증 A는 B의 어버이이다
윤증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29년 윤증이 서울에서 태어났다.
1647년 권씨의 딸과 혼인하고 그 밑에서 수학하였다.
1652년 송준길 밑에서 수학하였다.
1657년 김집의 권유로 송시열을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82년 호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09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14년 윤증이 세상을 떠났다.

주석

  1. 이동희, "윤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동희, "윤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범, "윤증",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이동희, "윤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김범, "윤증",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이동희, "윤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