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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와 탄생=== | ===가계와 탄생=== | ||
− | + | 원랑선사 대통(圓朗禪師 大通)은 816년 지금의 강원도 철원 지방인 통화부(通化府) 중정리(仲停里)에서 태어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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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선사의 이름은 대통(大通)이고 자(字)는 태융(太融), 성은 박씨(朴氏)이며 통화부(通化府)<ref>강원도 철원에 있었던 지명이다. 이지관, "충주 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18쪽.</ref> 중정리(仲停里) 출신이다. 대대로 벼슬과 영화를 멀리하였으며 가까운 조상은 소박한 ...을 이었다. 증조부와 할아버지는 ... (어머니) ...씨는 본래 취성군(取城郡: 지금의 황해도 황주) 사람이었다. 선사를 잉태한 날부터 예절을 지키고 행동을 삼가하였으며 경전을 외우는 것으로 태교를 하였는데, 그 태어나는 때에 보니 과연 범상치 않았다. 선사는 강과 산의 뛰어난 정기를 간직하고 하늘과 땅의 빼어난 기운을 받아서 마치 곤산(崑山)의 한조각 구슬과 같고 계림(桂林)의 한 줄기 가지와 같았다. | {{Blockquote|선사의 이름은 대통(大通)이고 자(字)는 태융(太融), 성은 박씨(朴氏)이며 통화부(通化府)<ref>강원도 철원에 있었던 지명이다. 이지관, "충주 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18쪽.</ref> 중정리(仲停里) 출신이다. 대대로 벼슬과 영화를 멀리하였으며 가까운 조상은 소박한 ...을 이었다. 증조부와 할아버지는 ... (어머니) ...씨는 본래 취성군(取城郡: 지금의 황해도 황주) 사람이었다. 선사를 잉태한 날부터 예절을 지키고 행동을 삼가하였으며 경전을 외우는 것으로 태교를 하였는데, 그 태어나는 때에 보니 과연 범상치 않았다. 선사는 강과 산의 뛰어난 정기를 간직하고 하늘과 땅의 빼어난 기운을 받아서 마치 곤산(崑山)의 한조각 구슬과 같고 계림(桂林)의 한 줄기 가지와 같았다.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출가수행=== | ===출가수행=== | ||
− | + |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제자백가|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달하였으며, 뒷날 불경을 읽고 인생의 무상을 통감하고 845년 출가하였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860 대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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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어린 시절을 지나서 성년이 되자 집 ...... "문장을 짓는 것을 게을리 하지말고 경사(經史: 경전과 역사책)를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너는 이것을 명심하여라"하였다. 선사는 이에 공손히 가르침을 받들어서 홀연히 스승을 찾아 떠났다. (선사의) 총명함은 (글을) 한번에 다섯 줄씩 읽어 내릴 정도이고 명민함은 한번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아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책을 두루 통달하였고,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소(論疏)의 내용들을 다 깨우쳤다. 그리고 나서는 불교의 경전들을 보았는데 더욱 많이 깨달아 ...... 옳고 그름이 다르지 않음을 ...... 곧 상투를 풀어 머리를 자르고 마옷을 벗고 승복을 걸쳤는데 이때가 회창(會昌)<ref>당 무종(唐 武宗)의 연호, 841-846.</ref> 을축년(문성왕 7, 845년) 봄이었다. | {{Blockquote|어린 시절을 지나서 성년이 되자 집 ...... "문장을 짓는 것을 게을리 하지말고 경사(經史: 경전과 역사책)를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너는 이것을 명심하여라"하였다. 선사는 이에 공손히 가르침을 받들어서 홀연히 스승을 찾아 떠났다. (선사의) 총명함은 (글을) 한번에 다섯 줄씩 읽어 내릴 정도이고 명민함은 한번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아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책을 두루 통달하였고,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소(論疏)의 내용들을 다 깨우쳤다. 그리고 나서는 불교의 경전들을 보았는데 더욱 많이 깨달아 ...... 옳고 그름이 다르지 않음을 ...... 곧 상투를 풀어 머리를 자르고 마옷을 벗고 승복을 걸쳤는데 이때가 회창(會昌)<ref>당 무종(唐 武宗)의 연호, 841-846.</ref> 을축년(문성왕 7, 845년) 봄이었다.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 | 신라 문성왕 | + | 845년([[신라 문성왕|문성왕]] 7) [[성린|성린(聖鱗)]]에게서 [[비구계|비구계(比丘戒)]]를 받고[[단엄사|단엄사(丹嚴寺)]]에서 정진하던 중, 사형(師兄)인 [[자인|자인(慈忍)]]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일에 자극을 받아 분발하여 석달 동안 선정(禪定)을 닦았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1574&cid=40942&categoryId=33375 대통]",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이후 [[광종|광종대사(廣宗大師)]]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하였다. |
− | + | {{Blockquote|대덕(大德) 성린(聖鱗)에게 나아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는데 승관(僧官)에서는 단엄사(丹嚴寺)에 배치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중략)... 이때에 선사의 동문(同門) 선배인 자인(慈仁)선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선사는 때때로 찾아가 뵈었다. 자인선사는 선사의 품은 뜻을 살펴보고 자신이 가르칠 수 없음을 알자, 이에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격려하여 용과 코끼리와 같은 마음을 내도록 자극하였다. 이에 선사는 꼭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조용히 간직하고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를 공부하고자 하여 직산(樴山)에 이르러 ...... 에 거처하였는데 이곳은 신승(神僧)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도를 깨치신 곳이었다. 선정(禪定)을 닦기 시작한지 3개월 후에 광종대사(廣宗大師)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광종대사는 즉시 그 재주를 알아 보고서 사찰의 사무를 맡아 보게 하였다. 사양하고자 했지만 할 수 없이 일을 맡게 되었다. | |
− | {{Blockquote|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36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 ||
===구법유학=== | ===구법유학=== | ||
− | 문성왕 | + | 856년([[신라 문성왕|문성왕]] 18) 사신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혜적|징허(澄虛)]]를 스승으로 섬겼다. 황매(黃梅)<ref>황매(黃梅)는 황매산(黃梅山)을 가리킨다. 황매산은 원래 호북성(湖北省) 기주 황매현에 있는 산인데, 이곳에서 선종의 제4조인 도신(道信)과 제5조인 홍인(弘忍)이 활약하여 동산법문(東山法門)을 개창하였다. 선종의 6조 혜능(慧能)이 홍인의 법을 이어받은 곳도 이곳이다.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6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ref>의 심인(心印)<ref>언어를 떠난 깨달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깨달음. 도장이 진실·확실을 나타내듯, 깨달음도 그러하므로 인(印)이라 함.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2071&cid=50292&categoryId=50292 심인]",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 </ref>을 받은 이후에는 중국의 명산을 순례하고 이름난 선사들을 두루 찾아보았다. | ||
+ | {{Blockquote|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업적이 있게 되자 "나는 마땅히 그만두고 떠나겠다"하고는 대중(大中)<ref>당 선종(唐 宣宗)의 연호, 847-860.</ref> 병자년(문성왕 18, 856년)에 당나라에 들어가는 하정사(賀正使)를 따라서 .......<br/> | ||
+ | 중국에 ...... 여러 사찰을 두루 찾아본 다음 앙산(仰山)<ref>중국 강서성 원주부에 있는 산으로 산이 높아서 우러러보기만 할 뿐이라는 뜻으로 앙산(仰山)이라 하였다. 이지관, "충주 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22쪽.</ref>에 이르러 징허대사(澄虛大師)에게 배웠다. 징허대사는 그 총명함을 알아 보고 마음을 정밀하게 갖도록 한 후 진종(眞宗)을 가르쳤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사는 근본 바탕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데다가 남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노력하였으므로 곧 지혜가 태양에 짝할 정도로 뛰어나게 되고 식견은 하늘에 가득찰 정도로 넓어지게 되었다. 더위와 추위를 겪으면서 황매(黃梅)의 심인(心印)을 이어 받았고 ......을 지나지 않아서 ...... 구슬을 ...... 그후에 명산을 순례하고 이름난 선사들을 두루 찾아보았다. |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6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 | {{Blockquote| | + | ===귀국 및 활동===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 + | 대통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866년([[신라 경문왕|경문왕]] 6)에 귀국하였다. |
+ | {{Blockquote|중국을 이미 다 돌아보고 나자 동방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함통(咸通)<ref>당 덕종(唐 德宗)의 연호, 860-873.</ref> 7년(경문왕 6, 866년)에 회역사(廻易使) 진량(陳良)을 따라서 신라에 돌아왔다. |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6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 | + | 귀국 이후 대통은 [[자인|자인선사(慈仁禪師)]]의 요청으로 [[제천 월광사|월광사(月光寺)]]에 주석하게 된다. | |
− | + | {{Blockquote|이듬해 봄에 산을 나와서 ......에 머물고 있었는데 여름밤 꿈에 월악(月嶽)의 신관(神官)이 나타나서 그곳으로 오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이 되자 자인선사(慈仁禪師)가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월광사(月光寺)는 신승(神僧) 도증(道證)이 세운 곳으로 과거에 우리 태종대왕(무열왕을 말함)께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 삼한(三韓)에서 전쟁을 그치게 하고 통일을 달성하신 때에 ......의 ...를 입어 ...의 재앙을 영원히 없애고자하여 특별히 이 산을 표창하여 으뜸되는 공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금강(金剛)에 기록되어 있고 선기(仙記)에 이름이 전해왔다. 시냇물은 맑고 차가우며 안개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속에 빼어난 기운을 간직하고 있고 ...전(傳)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 선사는 거기에 가서 거주하라'고 하였다. 선사는 메아리가 소리를 따르듯이 곧바로 옷을 떨치고 나아갔다. ...... 저녁의 꿈에 전에 나타났던 신관(神官)이 나타나 모시면서 ...... 예를 행하고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전에 외람되게 말씀 드린 바 있었는데 수고롭게도 멀리서 와 주셨습니다"고 하였다. |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6-37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 | {{Blockquote| | + | 대통이 [[제천 월광사|월광사]]에 주석한 다음 명성이 천지사방에 드높아 칭찬하는 소리가 궁중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신라 경문왕|경문왕]]은 영구히 대통이 [[제천 월광사|월광사]]의 주지를 맡도록 하였다.<ref>김혜완, 「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72쪽.</ref>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 + | {{Blockquote|이 때부터 단월(檀越: 절에 시주를 행하는 사람)들이 먼 지역에서부터 찾아 ......하였다. 이미 보산(寶山)에 이른 사람으로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아름다운 행위가 널리 드러났고 향기로운 이름이 멀리에까지 소문이 나서 명성은 천지와 사방에 드높고 찬사는 대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경문대왕께서는 오랫동안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넓히려고 하는 어진 마음을 가지고서 부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계셨는데 멀리서 선사의 덕을 듣고서 좋은 ...을 세울 생각으로 ...... 월 5일에 관영(觀榮)법사를 보내어 멀리서 금조(金詔)를 내려 칭찬하고 산문(山門)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월광사(月光寺)는 계속하여 선사가 주지를 맡도록 하였다.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7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입적=== | ===입적=== | ||
− | + | 대통은 883년([[신라 헌강왕|헌강왕]] 9) 10월 5일에 나이 68세로 입적하였다. | |
+ | {{Blockquote|중화(中和)<ref>당 희종(唐 僖宗)의 연호, 881-884.</ref> 3년(헌강왕 9, 883년) 한여름에 뱀들이 구멍에서 나와 골짜기에 가득차고 산을 덮었는데, 이들이 소리내어 슬프게 흐느끼고 머리를 숙이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선사는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사는 것에는 끝이 있으니 나라고 어찌 끝이 없겠느냐. 너희들은 마땅히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에 힘써야 할 것이다"라 하고 그해 10월 5일에 단정하게 ...... 나이는 68이요 승려 생활은 39년이었다. |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7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 | + | 입적 이듬해에 제자들이 유해를 옮겨 장사를 지냈으며, [[신라 헌강왕|헌강왕]]이 '원랑선사(圓朗禪師)'라고 추증하고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대통의 탑비]]는 입적 7년 후인 890년([[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4)에 세워졌다. | |
− | + | {{Blockquote|문인(門人)인 융환(融奐) 등이 그 다음해 2월 10일에 유해를 옮겨 북원(北院)에서 장사지냈지만 자애로운 스승과 영원히 헤어지게 됨에 그 사모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제자들은 시간이 흘러 산과 골짜기가 바뀌고 육지와 바다가 바뀌게 되면 법을 전하여 주신 선사의 은혜를 잊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하여서 우러러 추앙하는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에 행장(行狀)을 정리하여 ...... 커다란 비석을 세워 성대(聖代)를 빛내고자 하였다. ...... (왕은) 뛰어나신 문무(文武)의 덕을 갖추시고서 조상들이 하고자 하신 바를 계승하셨고 또 불교의 가르침에 더욱 깊이 의지하여 받들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선사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는 슬퍼하심이 지극하여서 그 마음을 스스로 이겨내시지 못하셨다. 이에 원랑선사(圓朗禪師)라고 시호(諡號)를 내려주시고 탑의 이름은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고 하셨다. | |
−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8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27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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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ckquote| | ||
− | |출처=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 ||
=='''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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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는 -가 비문을 새겼다 || [[진윤]]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는 -가 비문을 새겼다 || [[진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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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시각자료'''== | =='''시각자료'''== |
2017년 8월 15일 (화) 23:50 판
대통(大通) | |
대표명칭 | 대통 |
---|---|
영문명칭 | Daetong |
한자 | 大通 |
생몰년 | 816(헌덕왕 8)-883(헌강왕 9) |
시호 | 원랑선사(圓朗禪師) |
휘 | 대통(大通) |
탑호 | 대보선광(大寶禪光) |
자 | 태융(太融) |
성씨 | 박씨(朴氏) |
출신지 | 통화부(通化府, 현재의 강원도 철원) |
승탑비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원랑선사 대통(圓朗禪師 大通)은 816년 지금의 강원도 철원 지방인 통화부(通化府) 중정리(仲停里)에서 태어났다.
선사의 이름은 대통(大通)이고 자(字)는 태융(太融), 성은 박씨(朴氏)이며 통화부(通化府)[1] 중정리(仲停里) 출신이다. 대대로 벼슬과 영화를 멀리하였으며 가까운 조상은 소박한 ...을 이었다. 증조부와 할아버지는 ... (어머니) ...씨는 본래 취성군(取城郡: 지금의 황해도 황주) 사람이었다. 선사를 잉태한 날부터 예절을 지키고 행동을 삼가하였으며 경전을 외우는 것으로 태교를 하였는데, 그 태어나는 때에 보니 과연 범상치 않았다. 선사는 강과 산의 뛰어난 정기를 간직하고 하늘과 땅의 빼어난 기운을 받아서 마치 곤산(崑山)의 한조각 구슬과 같고 계림(桂林)의 한 줄기 가지와 같았다. | ||
출처: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
출가수행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달하였으며, 뒷날 불경을 읽고 인생의 무상을 통감하고 845년 출가하였다.[2]
어린 시절을 지나서 성년이 되자 집 ...... "문장을 짓는 것을 게을리 하지말고 경사(經史: 경전과 역사책)를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너는 이것을 명심하여라"하였다. 선사는 이에 공손히 가르침을 받들어서 홀연히 스승을 찾아 떠났다. (선사의) 총명함은 (글을) 한번에 다섯 줄씩 읽어 내릴 정도이고 명민함은 한번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아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책을 두루 통달하였고,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소(論疏)의 내용들을 다 깨우쳤다. 그리고 나서는 불교의 경전들을 보았는데 더욱 많이 깨달아 ...... 옳고 그름이 다르지 않음을 ...... 곧 상투를 풀어 머리를 자르고 마옷을 벗고 승복을 걸쳤는데 이때가 회창(會昌)[3] 을축년(문성왕 7, 845년) 봄이었다. | ||
출처: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
845년(문성왕 7) 성린(聖鱗)에게서 비구계(比丘戒)를 받고단엄사(丹嚴寺)에서 정진하던 중, 사형(師兄)인 자인(慈忍)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일에 자극을 받아 분발하여 석달 동안 선정(禪定)을 닦았다.[4] 이후 광종대사(廣宗大師)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하였다.
대덕(大德) 성린(聖鱗)에게 나아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는데 승관(僧官)에서는 단엄사(丹嚴寺)에 배치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중략)... 이때에 선사의 동문(同門) 선배인 자인(慈仁)선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선사는 때때로 찾아가 뵈었다. 자인선사는 선사의 품은 뜻을 살펴보고 자신이 가르칠 수 없음을 알자, 이에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격려하여 용과 코끼리와 같은 마음을 내도록 자극하였다. 이에 선사는 꼭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조용히 간직하고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를 공부하고자 하여 직산(樴山)에 이르러 ...... 에 거처하였는데 이곳은 신승(神僧)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도를 깨치신 곳이었다. 선정(禪定)을 닦기 시작한지 3개월 후에 광종대사(廣宗大師)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광종대사는 즉시 그 재주를 알아 보고서 사찰의 사무를 맡아 보게 하였다. 사양하고자 했지만 할 수 없이 일을 맡게 되었다. | ||
출처: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3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
구법유학
856년(문성왕 18) 사신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징허(澄虛)를 스승으로 섬겼다. 황매(黃梅)[5]의 심인(心印)[6]을 받은 이후에는 중국의 명산을 순례하고 이름난 선사들을 두루 찾아보았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업적이 있게 되자 "나는 마땅히 그만두고 떠나겠다"하고는 대중(大中)[7] 병자년(문성왕 18, 856년)에 당나라에 들어가는 하정사(賀正使)를 따라서 ....... 중국에 ...... 여러 사찰을 두루 찾아본 다음 앙산(仰山)[8]에 이르러 징허대사(澄虛大師)에게 배웠다. 징허대사는 그 총명함을 알아 보고 마음을 정밀하게 갖도록 한 후 진종(眞宗)을 가르쳤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사는 근본 바탕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데다가 남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노력하였으므로 곧 지혜가 태양에 짝할 정도로 뛰어나게 되고 식견은 하늘에 가득찰 정도로 넓어지게 되었다. 더위와 추위를 겪으면서 황매(黃梅)의 심인(心印)을 이어 받았고 ......을 지나지 않아서 ...... 구슬을 ...... 그후에 명산을 순례하고 이름난 선사들을 두루 찾아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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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
귀국 및 활동
대통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866년(경문왕 6)에 귀국하였다.
중국을 이미 다 돌아보고 나자 동방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함통(咸通)[9] 7년(경문왕 6, 866년)에 회역사(廻易使) 진량(陳良)을 따라서 신라에 돌아왔다. | ||
출처: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
귀국 이후 대통은 자인선사(慈仁禪師)의 요청으로 월광사(月光寺)에 주석하게 된다.
이듬해 봄에 산을 나와서 ......에 머물고 있었는데 여름밤 꿈에 월악(月嶽)의 신관(神官)이 나타나서 그곳으로 오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이 되자 자인선사(慈仁禪師)가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월광사(月光寺)는 신승(神僧) 도증(道證)이 세운 곳으로 과거에 우리 태종대왕(무열왕을 말함)께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 삼한(三韓)에서 전쟁을 그치게 하고 통일을 달성하신 때에 ......의 ...를 입어 ...의 재앙을 영원히 없애고자하여 특별히 이 산을 표창하여 으뜸되는 공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금강(金剛)에 기록되어 있고 선기(仙記)에 이름이 전해왔다. 시냇물은 맑고 차가우며 안개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속에 빼어난 기운을 간직하고 있고 ...전(傳)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 선사는 거기에 가서 거주하라'고 하였다. 선사는 메아리가 소리를 따르듯이 곧바로 옷을 떨치고 나아갔다. ...... 저녁의 꿈에 전에 나타났던 신관(神官)이 나타나 모시면서 ...... 예를 행하고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전에 외람되게 말씀 드린 바 있었는데 수고롭게도 멀리서 와 주셨습니다"고 하였다. | ||
출처: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6-3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
대통이 월광사에 주석한 다음 명성이 천지사방에 드높아 칭찬하는 소리가 궁중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경문왕은 영구히 대통이 월광사의 주지를 맡도록 하였다.[10]
이 때부터 단월(檀越: 절에 시주를 행하는 사람)들이 먼 지역에서부터 찾아 ......하였다. 이미 보산(寶山)에 이른 사람으로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아름다운 행위가 널리 드러났고 향기로운 이름이 멀리에까지 소문이 나서 명성은 천지와 사방에 드높고 찬사는 대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경문대왕께서는 오랫동안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넓히려고 하는 어진 마음을 가지고서 부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계셨는데 멀리서 선사의 덕을 듣고서 좋은 ...을 세울 생각으로 ...... 월 5일에 관영(觀榮)법사를 보내어 멀리서 금조(金詔)를 내려 칭찬하고 산문(山門)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월광사(月光寺)는 계속하여 선사가 주지를 맡도록 하였다. | ||
출처: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
입적
대통은 883년(헌강왕 9) 10월 5일에 나이 68세로 입적하였다.
중화(中和)[11] 3년(헌강왕 9, 883년) 한여름에 뱀들이 구멍에서 나와 골짜기에 가득차고 산을 덮었는데, 이들이 소리내어 슬프게 흐느끼고 머리를 숙이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선사는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사는 것에는 끝이 있으니 나라고 어찌 끝이 없겠느냐. 너희들은 마땅히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에 힘써야 할 것이다"라 하고 그해 10월 5일에 단정하게 ...... 나이는 68이요 승려 생활은 39년이었다. | ||
출처: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
입적 이듬해에 제자들이 유해를 옮겨 장사를 지냈으며, 헌강왕이 '원랑선사(圓朗禪師)'라고 추증하고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대통의 탑비는 입적 7년 후인 890년(진성여왕 4)에 세워졌다.
문인(門人)인 융환(融奐) 등이 그 다음해 2월 10일에 유해를 옮겨 북원(北院)에서 장사지냈지만 자애로운 스승과 영원히 헤어지게 됨에 그 사모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제자들은 시간이 흘러 산과 골짜기가 바뀌고 육지와 바다가 바뀌게 되면 법을 전하여 주신 선사의 은혜를 잊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하여서 우러러 추앙하는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에 행장(行狀)을 정리하여 ...... 커다란 비석을 세워 성대(聖代)를 빛내고자 하였다. ...... (왕은) 뛰어나신 문무(文武)의 덕을 갖추시고서 조상들이 하고자 하신 바를 계승하셨고 또 불교의 가르침에 더욱 깊이 의지하여 받들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선사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는 슬퍼하심이 지극하여서 그 마음을 스스로 이겨내시지 못하셨다. 이에 원랑선사(圓朗禪師)라고 시호(諡號)를 내려주시고 탑의 이름은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고 하셨다. | ||
출처: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3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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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는 -를 위한 승탑이다 | 대통 | |
무염 | 는 -의 스승이다 | 대통 | |
징허대사 | 는 -의 스승이다 | 대통 | |
대통 | 는 -의 스승이다 | 진윤 | |
자인 | 는 -의 동문이다 | 대통 | |
대통 | 는 -에서 주석하였다 | 월광사 | |
대통 | 는 -에서 수행하였다 | 단엄사 | |
대통 | 는 -에서 수행하였다 | 직산 | |
대통 | 는 -와 관련있다 | 위앙종 |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는 -가 비문을 지었다 | 김영 |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는 -가 비문을 썼다 | 순몽 |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는 -가 비문을 새겼다 | 진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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