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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및 활동=== | ===귀국 및 활동=== | ||
+ | 본국에서 새로 고려가 건국되고 사회 질서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924년에 돌아오니 태조(太祖 : 왕건 王建)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맞아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 인명사전 | ||
− | {{Blockquote|동방(東方)으로부터 전하는 소식이, 지금 본국(本國)에는 전쟁의 안개가 걷히고 바다에는 점차 파도가 사라져서 외난(外難)은 모두 소멸되고 다시 중흥(中興)을 이루었다는 것이었다. 동광(同光) 2년(924)에 본국에 돌아오자 모든 국민이 서로 경하(慶賀)하여 환영하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으니, 마치 교지군(交趾郡)으로 달아났던 구슬이 다시 합포(合浦)로 돌아오고, 진(秦)나라로 팔려갔던 보벽(寶璧)이 무사히 조(趙)나라로 되돌아온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오직 우담발화가 한 번 나타나고, 마륵금(摩勒金)이 중중(重重)히 비추는 것과 같았다. | + | {{Blockquote|동방(東方)으로부터 전하는 소식이, 지금 본국(本國)에는 전쟁의 안개가 걷히고 바다에는 점차 파도가 사라져서 외난(外難)은 모두 소멸되고 다시 중흥(中興)을 이루었다는 것이었다. 동광(同光) 2년(924)에 본국에 돌아오자 모든 국민이 서로 경하(慶賀)하여 환영하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으니, 마치 교지군(交趾郡)으로 달아났던 구슬이 다시 합포(合浦)로 돌아오고, 진(秦)나라로 팔려갔던 보벽(寶璧)이 무사히 조(趙)나라로 되돌아온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오직 우담발화가 한 번 나타나고, 마륵금(摩勒金)이 중중(重重)히 비추는 것과 같았다. <br/> |
+ | 태조(太祖) 임금이 특사를 보내어 교외(郊外)에서 영접하게 하였으니, 융성한 총애의 영광(榮光)이 당시로는 으뜸이었다. 다음날 구중(九重)으로 맞아들여 3등의 품계를 내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찬앙하여 국사(國師)로서 우대하였다. | ||
|출처=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7-238쪽.}} | |출처=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7-238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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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고려 태조]]는 현휘를 [[충주 정토사]]의 주지로 삼아 머물게 하였다. 현휘의 명성을 듣고 사방으로부터 대중이 모이고, 중원 지방의 선비들도 무리를 이루어 찾아왔으며, 조정의 사류(士流)들도 왕명을 받들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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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ckquote|임금의 불심(佛心)은 더욱 돈독해지고 스님을 자주 친견하려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여 가까운 곳인 중주(中州) 정토난야(淨土蘭若)에 주지(住持)토록 청하였다. 스님은 스스로 생각하되 “방금 입당유학(入唐遊學)을 마치고 창명(滄溟)을 헤쳐 귀국하여 항상 주석(住錫)할 만한 유곡(幽谷)을 생각하던 터이라 이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리요”하고는 문득 행장(行裝)을 정돈하였다. 한광(漢廣)을 건너고 유유히 산을 넘어 그곳에 가서 주석하니, 주변이 매우 아름답고 산천(山泉)이 수려(秀麗)하였다. 중주(中州)에 소문을 듣고 기꺼운 마음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백천(百千)이나 되었다. | ||
+ | |출처=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9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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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토사에 상주하면서 광평시중을 지낸 유권열과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충주 호족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중부 내륙지역민에 대한 교화에 힘씀으로써 다수의 호족 세력을 태조 왕건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 충주문화대전 | ||
+ | {{Blockquote|이 때 좌승(佐丞)인 유인열(劉權說)이란 신하가 있었는데, 이는 마치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재상(宰相)인 부설(傅說)과 같았다. 나라의 충신이며 재가(在家)의 제자(弟子)였다. 니부(尼父)인 공자(孔子)를 찬양하는 선비이니 마치 안연(顔淵)의 무리와 같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신봉(信奉)하였으니 아울러 아난(阿難)과 같은 류(類)라하겠다. 특히 선경(禪境)에 이르러 스님을 친견하고 문득 피석(避席)의 의례(儀禮)를 폈으며, 깊이 구의(摳衣)의 정성을 오롯하게 하였다. | ||
+ | |출처=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9-240쪽.}} | ||
===입적=== | ===입적=== | ||
− | {{Blockquote| | + | 941년 현휘는 |
− | |출처=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 + | {{Blockquote|천복(天福) 6년 11월 26일 이른 아침에 문인(門人)을 모아 놓고 이르되 “가고 머무는 것은 때가 있으나, 오고 감은 주(住)함이 없도다”하시고, 조용히 입적(入寂)하니, 주변에 있는 유물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너희는 힘써 유계(遺誡)를 봉행하여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으므로써 나의 은혜를 갚으라”하였다. 열반(涅槃)에 들기 전날 저녁에 제자가 묻기를 “화상(和尙)께서 세상을 떠나시려는 마당에 법등(法燈)을 누구에게 부촉(付囑)하시렵니까”하니, 스님이 말씀하시길 “등등마다 스스로 동자(童子)가 있어 점화(點火)한다”하고 하였다. 다시 묻되 “저 동자(童子)는 어떻게 펴 보입니까”하니, 답하시되 “별이 청천(靑天)에 가득 포열(布列)되어 있으니,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라 하고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열반에 드시니, 속년(俗年)은 63세요, 승랍(僧臘)은 41이었다. 이 때 구름과 해는 처참하고, 바람과 샘물은 오열하며 산천이 진동하고, 새와 짐승들은 슬피 울며, 제천(諸天)이 창언(唱言)하되 사람마다 눈이 없어졌다하고 주변 열군(列郡)들의 군민은 한(恨)을 머금고 울먹였다. 세상은 공허하여 천인(天人)들마저 슬퍼하는 상심(傷心)을 가히 알 만하였다. 성감(聖感)과 영응(靈應)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제자(弟子) 활행(闊行) 등 300여인이 울면서 유해(遺骸)를 받들고 3일 만인 그 달 28일 개천산(開天山) 북봉(北峰) 남쪽 기슭에 하관(下棺)하였으니, 이는 상교(像敎)를 준수한 것이다.<br/> |
+ | 임종하시기 직전 왕에게 표(表)를 받들어 고하니, “노승(老僧)이 뜻하였던 바를 이룩하지 못하고 영원히 성상(聖上)을 하직하려 하여 인사에 대신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표상(表狀)을 펼쳐 보시고 크게 애도하면서 시호(謚號)를 법경대사(法鏡大師), 탑명(塔名)을 자등지탑(慈燈之塔)이라고 추증(追贈)하였다. 임금으로서 스님을 존중(尊重)함이 작연(焯然)하면서도 멀리서나마 깊이 추모하는 예의(禮儀)를 갖추었음을 알겠다. | ||
+ | |출처=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43-244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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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4일 (월) 23:42 판
현휘(玄暉) | |
대표명칭 | 현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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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yeonhwi |
한자 | 玄暉 |
생몰년 | 879(헌강왕 5)-941(태조 24) |
시호 | 법경(法鏡) |
탑호 | 자등(慈燈) |
성씨 | 이씨(李氏) |
본관 | 남원(南原) |
승탑비 |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 전기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당나라 출신 귀화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덕순(李德順), 어머니는 부씨(傅氏)이다. 879년(헌강왕 5) 현 전라북도 남원에서 육두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 충주문화대전
유년기
나면서부터 거룩한 자태가 있고 보통 아이들 놀음은 전연 안하고 모래 위에 돌을 모아 불탑을 쌓아 올리는 놀이를 즐겨 하였다. - 인명사전
13개월 동안 모태 중에 있다가 건부(乾符) 6년[1] 1월 1일 오시(午時)에 탄생하였다. 스님은 선천적으로 성자(聖姿)를 지니고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하는 장난은 하지 않았다. 불상이나 어른을 보면 합장(合掌)하고, 앉을 때는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으며, 땅과 담벽 등에는 불상(佛像)과 탑형(塔形)을 그렸다. 고기에 물을 먹여 살리고 벌레들에게는 먹이를 주어 구제하기도 하였다. | ||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0쪽. |
출가수행
어려서 영동군 영각산사의 심광대사에게서 불법을 배운 뒤 무염화상의 문하에서 선법을 공부했다. - 충주문화대전
898년(효공왕 2) 해인사에서 구족계(승려의 계율)를 받았다. - 충주문화대전
한 번은 그가 10여 명과 함께 난리를 피하여 무주에 이르렀는데, 도둑떼의 습격을 받아 함께 간 동행이 차례로 죽었다. 그의 차례가 되었는데도 죽음 앞에서 얼굴빛이 태연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자, 도둑의 우두머리가 칼을 던지고 엎드려 절하면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기를 자원하였다고 한다. - 남원문화대전
구법유학
906년 당나라에 가서 구봉산(九峰山)도건(道乾)의 문하에서 입실참선(入室參禪)하며 머무른 지 10여 일 만에 심요(心要)를 받았다. - 민백 907년(효공왕 11) 그는 당나라로 가서 구봉산(九峰山)의 도건(道乾)을 만나고 입실을 허락받아 참선을 시작했다.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심요(心要)를 전해 받았다고 한다. 그 뒤 10여 년 동안 중국을 돌면서 성지들을 참배하고 선지식을 찾아보았다. - 남원문화대전
그 후 스님은 “내가 여기에 머물게 되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막혀 버리리라”하시고, 천우(天祐) 3년[2] 해안(海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연히 당(唐)나라로 가는 배를 만나 편승(便乘)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목적지인 피안(彼岸)에 도달하여 이리 저리 서상(西上)하다가, 길을 동양(東陽)으로 돌려 팽택(彭澤)을 지나 드디어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경건한 마음으로 도건대사[道乾(도건:道虔)大師]를 친견하게 되었다. 마침 대사(大師)가 뜰에 서 있었으니 절을 하고 엎드려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대사(大師)가 스님을 보고 “도리(闍梨)는 머리가 희구려”하거늘, 스님이 대답하되 “현휘(玄暉)는 아무리 보아도 저 자신을 알 수 없나이다”하니, 다시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하였다. 대답하되 “저의 머리가 희다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추억을 더듬어보니 너와 이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하였다. 기꺼운 바는 승당(昇堂)하여 대사(大師)의 오묘한 경지(境地)를 보고 입실(入室)해서 참선(參禪)토록 하였는데, 겨우 10일이 되자마자 심요(心要)를 전해 받아 묵묵히 서로 계합(契合)하였다. | ||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5-236쪽. |
귀국 및 활동
본국에서 새로 고려가 건국되고 사회 질서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924년에 돌아오니 태조(太祖 : 왕건 王建)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맞아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 인명사전
또한 고려 태조는 현휘를 충주 정토사의 주지로 삼아 머물게 하였다. 현휘의 명성을 듣고 사방으로부터 대중이 모이고, 중원 지방의 선비들도 무리를 이루어 찾아왔으며, 조정의 사류(士流)들도 왕명을 받들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정토사에 상주하면서 광평시중을 지낸 유권열과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충주 호족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중부 내륙지역민에 대한 교화에 힘씀으로써 다수의 호족 세력을 태조 왕건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 충주문화대전
입적
941년 현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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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강정만, "현휘",
『디지털남원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두진, 「나말여초의 선종산문과 그 사상의 변화」, 『신라문화』Vol.27, 2006, 111-131쪽.
- 김상현, "현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혜완, 「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57-292쪽.
- 이인재, 「충주 정토사 현휘와 영월 흥녕사 절중 - 고려 혜종대 정변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93-321쪽.
-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10-248쪽.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현휘",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