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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이란 주도 정치세력의 급격한 교체로 인한 정국의 대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에 붕당정치론이 수용된 이후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의 정치 세력이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공존적 협력을 유지하며 정치 운영을 해나갔다. 그러나 [[조선 숙종|숙종]]대에서 [[조선 영조|영조]]대 초반에 걸쳐 서인 대 남인, 노론 대 소론의 정치 세력의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져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정국 운영이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의 정치를 환국정치라고 부른다. | 환국이란 주도 정치세력의 급격한 교체로 인한 정국의 대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에 붕당정치론이 수용된 이후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의 정치 세력이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공존적 협력을 유지하며 정치 운영을 해나갔다. 그러나 [[조선 숙종|숙종]]대에서 [[조선 영조|영조]]대 초반에 걸쳐 서인 대 남인, 노론 대 소론의 정치 세력의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져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정국 운영이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의 정치를 환국정치라고 부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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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2017년 8월 14일 (월) 15:43 판
갑술환국(甲戌換局) | |
대표명칭 | 갑술환국 |
---|---|
한자표기 | 甲戌換局 |
이칭 | 갑술옥사, 감술경화 |
시대 | 조선 |
날짜 | 1694년 |
관련인물 | 인현왕후, 조선 숙종, 희빈 장씨, 허새, 복평군 |
관련단체 | 금위영 |
관련유물유적 | 한산이씨 고행록 |
목차
정의
1794년(숙종 20) 폐출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고 왕후가 되었던 세자의 생모 장씨를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시키는 조치와 함께 남인(南人)이 축출되고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치적 사건이다. [1]
내용
환국의 정의
환국이란 주도 정치세력의 급격한 교체로 인한 정국의 대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에 붕당정치론이 수용된 이후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의 정치 세력이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공존적 협력을 유지하며 정치 운영을 해나갔다. 그러나 숙종대에서 영조대 초반에 걸쳐 서인 대 남인, 노론 대 소론의 정치 세력의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져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정국 운영이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의 정치를 환국정치라고 부른다. [2]
갑술환국의 경과
노론과 소론의 등장
1680년 경신환국으로 김석주(金錫胄)를 중심으로 한 서인 훈척 계열이 군사적 실권을 독점하며 정국을 주도하였다. 김석주는 군제 개혁을 주관하면서 금위영(禁衛營)이라는 새로운 군영을 창설하였다. 1682년 남인 허새(許璽) 등이 복평군(福平君)을 추대하려 한다는 역모가 고발된 이후 증거가 불충분한 사건의 처리방향을 두고 훈척과 연소 신료들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서인계 관료와 지식인들은 각각 지지하는 입장에 따라 분화되었고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 간의 사제간 갈등이 이에 결부되면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붕당이 성립되었다. [3]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1688년 10월 남인과 연결되어 있는 역관 집안 출신의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듬해 숙종은 태어난 지 두 달된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 즉 차기에 왕위를 계승할 아이로 못박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서인 신료들은 왕비 인현왕후가 아직 젊고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숙종이 이를 고집하여 왕자를 원자로 정했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4]
기사환국
1789년 2월 노론계의 영수이자 산림인 송시열이 원자 정호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숙종은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하는 동시에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계 인물들로 대체시키는 기사환국을 단행했다. 인현왕후는 투기를 일삼는다는 이유로 폐출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 1690년 6월에는 3세의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등이 진출한 남인 정권 아래에서 왕비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가 관례를 뛰어넘어 총융사(摠戎使)로 발탁되고, 역관으로 막대한 재부를 이루고 있던 장씨 가문의 인물들은 과도한 사치로 눈총을 받았다. [5]
갑술환국
1794년 3월 우의정 민암(閔黯)이 소론계 한중혁(韓重赫)이 돈을 모아 장희재나 동평군 항(東平君 杭) 등 실권자에게 접근하여 궁중의 틈을 엿보았고, 김춘택(金春澤) 등도 이에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을 아뢰었다.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문초를 했으나 완강하게 부인하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던 때에 또 다른 고변서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장희재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숙원(淑媛) 최씨를 독살하려 했고, 또 신천군수와 훈국별장 등이 반역을 도모하는데 민암 등 남인이 결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민암이 최초의 고변의 사주자라는 것이 밝혀진 후 숙종은 다시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남인계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래선 등이 관작이 삭탈되어 문외출송 당했고 민암, 유명현(柳命賢) 등이 모두 유배형을 받았다. [6]
지식 관계망
주석
- ↑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지영, "갑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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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