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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남종선(南宗禪) 계통인 마조(馬祖)의 수제자 남전(南泉)에게서 법을 받고 돌아온 도윤(道允)이 금강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입실하여 수도하였다. - 민백 | 중국에서 남종선(南宗禪) 계통인 마조(馬祖)의 수제자 남전(南泉)에게서 법을 받고 돌아온 도윤(道允)이 금강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입실하여 수도하였다. - 민백 | ||
장담사에 오랫동안 머물며 도윤의 선법을 충실히 계승함. | 장담사에 오랫동안 머물며 도윤의 선법을 충실히 계승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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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ckquote|풍악(楓岳)<ref>풍악은 보통 금강산의 이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의 풍악은 내용상 도윤화상이 머물고 있던 전라남도 지역의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ref> 장담사(長潭寺)에 오랫동안 중국에 가서 유학하고 귀국한 지 아직 얼마되지 않은 도윤(道允) 화상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화상이) 선을 닦고 계시는 곳으로 찾아가 오체투지<ref>불교에서 행하는 큰절의 형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89264&cid=40942&categoryId=31543 오체투지]",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의 예를 올렸다. 화상께서는 "영산에서 너와 헤어진 지 벌써 몇 생(生)이나 되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었구나. 어찌 이다지도 늦게 왔는가"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미 입실을 허락받고서 스님의 자애로운 가르침에 깊이 감화되었으니 스스로 바라는 바에 맞았다. 이로부터 화상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화상은 일찍이 중국에서 남전화상(南泉和尙)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알현하였었다. 남전(南泉)은 강서도일(江西道一)을 계승하였고, 강서(江西)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을 이었으며, 남악(南岳)은 곧 조계혜능(曹溪慧能)의 으뜸가는 제자이니, 그 고조와 증조를 가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사(大師)는 이때부터 (도윤화상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좌우(左右)를 떠나지 아니하고, 동산(東山)의 법을 이어받게 되었다. | ||
+ | |출처=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4-45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39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그 후 도담선원으로 옮겨 역시 중국에서 선을 수학하고 돌아온 자인선사의 문하에서 16년간 수학함 | 그 후 도담선원으로 옮겨 역시 중국에서 선을 수학하고 돌아온 자인선사의 문하에서 16년간 수학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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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ckquote|그 후 곧바로 도담(道譚)선(원?)에 가서 자인(慈忍)선사를 함께 알현하였다. (대사가) 찾아뵙고 예를 드리자마자 (자인선사는) 곧바로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처럼 "만나는게 늦었다. 목을 길게 늘여 빼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중략)... 그리고 나서 16년 동안 선문에 머무르며 진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마침내 망언(亡言)의 경지를 밟아 득의(得意)의 마당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니 쪽보다 더 푸르고, 붉은 빛은 꼭두서니에서 나왔지만 꼭두서니보다 더 붉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
+ | |출처=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5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39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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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1일 (금) 22:03 판
절중(折中) | |
대표명칭 | 절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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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Jeoljung |
한자 | 折中 |
생몰년 | 826(흥덕왕 1)-900(효공왕 4) |
시호 | 징효(澄曉) |
호 | 통효(通曉) |
휘 | 절중(折中) |
탑호 | 보인(寶印) |
승탑 | 영월 징효국사 부도 |
승탑비 |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은 826년(헌덕왕 18) 휴암(鵂嵒: 현재의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선당(先幢)은 지방의 동량[1]으로, 대대로 지방 토호였던 것으로 보인다.[2]
대사는 휘(諱)가 절중(折中), 자(字)는 ... 속성은 ...씨이며 휴암(鵂嵒) 사람이다. 조상이 모성(牟城)[3]에서 벼슬살이하다가 마침내 그곳의 군족(郡族)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당(先幢)인데,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뛰어나서 명성이 화이(華夷)에 유명하였다. 효행과 자비로움은 역사서에 실렸고, 공로와 업적은 왕부(王府)에 간직되었으니, 고을의 귀감이 되고 마을의 동량이 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절중의 어머니 백씨(白氏)는 한 천녀(天女)가 아름다운 보배 구슬을 건네주는 꿈을 꾸고 대사를 잉태하였다.
어머니 백씨(白氏)가 잠깐 잠이 들었을 때 한 천녀(天女)가 "아미(阿㜷)께서는 반드시 지혜 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보배를 ... 꿈을 꾸어 ... 대사(大師)를 임신하게 되었다. 보력(寶曆) 2년(826, 헌덕왕 18) 4월 7일에 탄생하시었는데, 날 때부터 성스러운 자태를 지녔고, 아이들처럼 놀지 아니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출가수행
832년 7세에 오관산사로 들어가 출가
일곱 살 때 선승(禪僧)이 걸식(乞食)하는 스님을 보고서 출가(出家)를 흠모하는 마음을 내게 되었다. 마침내 양친(兩親)을 하직하고서 홀로 오관산사(五冠山寺)에 가서 진전법사(珍傳法師)를 배알하였다. 법사께서 이마를 만져 주는 순간 문득 마음을 쉰다는(息心) 뜻을 깨달았으며 곧 자실(慈室)[4]에 머무르면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4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840년 15세에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함
844년 19세에 안성 장곡사에서 구족계를 받음
열아홉 살이 되자 백성군(白城郡: 경기도 안성)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대사(大師)가 (계(戒)를 받으려고) 계단(戒壇)에 올라가는 날에 갑자기 보랏빛 기운이 계단에서 솟아올랐다. (이를 본) 이 절의 노(老)스님이 대중들에게 "이 사미(沙彌)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닦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증험을 보인 것으로 보건대 마땅히 계주(戒珠)를 얻었을 것이다. 반드시 후대(後代)에 미혹한 중생을 인도할 사람이므로 먼저 이러한 특별한 징조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이전의 태몽(胎夢)을 돌이켜 생각하니 완연히 부합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이후 여러 지역을 다니며 공부하다가, 중국에서 남종선(南宗禪) 계통인 마조(馬祖)의 수제자 남전(南泉)에게서 법을 받고 돌아온 도윤(道允)이 금강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입실하여 수도하였다. - 민백 장담사에 오랫동안 머물며 도윤의 선법을 충실히 계승함.
풍악(楓岳)[5] 장담사(長潭寺)에 오랫동안 중국에 가서 유학하고 귀국한 지 아직 얼마되지 않은 도윤(道允) 화상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화상이) 선을 닦고 계시는 곳으로 찾아가 오체투지[6]의 예를 올렸다. 화상께서는 "영산에서 너와 헤어진 지 벌써 몇 생(生)이나 되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었구나. 어찌 이다지도 늦게 왔는가"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미 입실을 허락받고서 스님의 자애로운 가르침에 깊이 감화되었으니 스스로 바라는 바에 맞았다. 이로부터 화상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화상은 일찍이 중국에서 남전화상(南泉和尙)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알현하였었다. 남전(南泉)은 강서도일(江西道一)을 계승하였고, 강서(江西)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을 이었으며, 남악(南岳)은 곧 조계혜능(曹溪慧能)의 으뜸가는 제자이니, 그 고조와 증조를 가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사(大師)는 이때부터 (도윤화상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좌우(左右)를 떠나지 아니하고, 동산(東山)의 법을 이어받게 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4-4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그 후 도담선원으로 옮겨 역시 중국에서 선을 수학하고 돌아온 자인선사의 문하에서 16년간 수학함
그 후 곧바로 도담(道譚)선(원?)에 가서 자인(慈忍)선사를 함께 알현하였다. (대사가) 찾아뵙고 예를 드리자마자 (자인선사는) 곧바로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처럼 "만나는게 늦었다. 목을 길게 늘여 빼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중략)... 그리고 나서 16년 동안 선문에 머무르며 진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마침내 망언(亡言)의 경지를 밟아 득의(得意)의 마당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니 쪽보다 더 푸르고, 붉은 빛은 꼭두서니에서 나왔지만 꼭두서니보다 더 붉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활동
882년 57세에 정부로부터 곡산사에 머물도록 요청받았지만 수도가 가깝다는 이유로 거절
대신 영월 사자산에 있던 운예선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제자들을 이끌고 사자산 흥녕선원에 주석함. 이에 왕실에서는 흥녕선원을 중사성에 소속시키고 여러 우대 조치를 베풀어 줌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하지만 신라 말의 혼란기에 전란이 잇따라 흥녕선원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음 886년 다시 제자들을 이끌고 상주 근처 사찰에 머무르다가, 스승인 도윤의 묘탑과 옛 동문들이 있는 쌍봉사로 감.
쌍봉사가 있는 무주에 도착한 후에는 지방 세력가 김사윤이 제공한 승주 동림사에 머무름.
입적
다시 전란을 염려하여 강화도 은강선원으로 감. 그가 은강선원에 머물렀을 때 진성여왕은 황양현(荒壤縣, 斧壤縣이라는 설도 있음)의 부수(副守) 장연열(張連說)을 보내어 국사(國師)의 예우를 표하고 보좌를 청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음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 민백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900년 3월 그곳에서 입적함. 나이 74세, 법랍 56세였다.
절중 사후 문도들은 사리를 모시고 동림사로 가서 묘탑을 건립한 후 신라 정부에 탑비의 건립을 요청함. 효공왕이 징효대사와 보인지탑이라는 시호와 탑호를 내려준 후 예부시랑 박인범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했지만, 박인범은 비문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
고려 건국 이후, 태조 왕건이 최인연에게 비문의 작성을 지시하고, 924년에 비문이 완성됨.
비문의 완성 이후에도 후삼국 항쟁의 과정에서 비석이 건립되지 못하다가 944년에 비로소 절중의 문도들이 머물던 사자산 흥녕선원에 건립됨.
절중의 탑비는 본래 신라 때에 건립할 예정이었지만 후삼국의 혼란기에 비문의 찬술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여 고려가 건국한 후인 924년에 비로소 비문이 완성되었고, 944년(혜종 원년)에 건립되었다. 고려 초의 대표적 문장가로 여러 고승들의 탑비를 지은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지었으며, 최윤(崔潤)이 당시에 유행하던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楷書體)로 글씨를 쓰고, 최오규(崔奧規)가 글자를 새겼다.[7]
절중 문도의 거점이 된 흥녕선원은 충주 유씨를 비롯한 지역 세력가들의 후원을 받아 고려 초에 중창된 것으로 보이며, 사자산문의 중심사찰로 자리잡게 되었음.
- 김혜완, 「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57-292쪽.
- 박선영, "절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인재, 「충주 정토사 현휘와 영월 흥녕사 절중 - 고려 혜종대 정변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93-321쪽.
- 이일야, "사자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79-205쪽.
- 장일규, 「신라 말 고려 초 선승의 시기별 지역별 활동 추이와 산문 형성 과정」, 『신라사학회』 Vol.39, 2017, 133-163쪽.
-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5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최연식, 「사자산 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 『불교학연구』 Vol.21, 2008, 219-257쪽.
- "절중",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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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량지재(棟梁之材). 기둥과 들보로 쓸 만한 재목이라는 뜻으로, 한 집안이나 한 나라를 떠받치는 중대한 일을 맡을 만한 인재를 이르는 말.
- ↑ 박선영, "절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지금의 강원도 금화군 금성면 지역으로 추정됨.
- ↑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로 사찰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 ↑ 풍악은 보통 금강산의 이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의 풍악은 내용상 도윤화상이 머물고 있던 전라남도 지역의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 ↑ 불교에서 행하는 큰절의 형태. "오체투지",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참고문헌
- 김혜완, 「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57-292쪽.
- 박선영, "절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인재, 「충주 정토사 현휘와 영월 흥녕사 절중 - 고려 혜종대 정변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93-321쪽.
- 이일야, "사자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79-205쪽.
-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76-307쪽.
- 장일규, 「신라 말 고려 초 선승의 시기별 지역별 활동 추이와 산문 형성 과정」, 『신라사학회』 Vol.39, 2017, 133-163쪽.
-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5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최연식, 「사자산 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 『불교학연구』 Vol.21, 2008, 219-257쪽.
- "절중",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