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린 밀수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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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국회의원의 언론제보로 삼성이 밀수품을 팔아 거액을 챙기고 있다는 게 사실이 폭로됐다. 이를 두고 '밀수 자체가 박정희 정권과 삼성의 밀약이었는데 정권이 뒤통수를 쳤다'는 주장(장남 이맹희)에서부터 "이병철의 삼성 재벌의 계획적인 밀수"(김형욱)라는 비난, "현장담당 사원의 부주의로 발생"(이병철)한 것이라는 해명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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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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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린 밀수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여당 국회의원의 언론제보였다.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건축자재로 위장한 밀수품을 팔아 거액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제보는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밀수'를 '5대 사회악'의 하나로 규정해놓고 있었으며, 당시 삼성과 경쟁 관계에 있던 언론들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일개 회사의 일탈이 아니라 정권과의 뒷거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요구대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했고, 사건은 마무리됐다. 권위주의 시대 권력과 재벌은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까, "파란많던 생애에서도 더할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을 했다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밀수범'은 감옥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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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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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22일 이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가 진행 중이던 국회 본회의에서 [[김두한]] 의원이 각료들에게 [[국회 오물투척사건|오물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했다.<br/>
이후 이 전 회장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고 언론사 소유 지분도 내다판다고 약속했으나, 70년대 후반 경영에 복귀했고 <중앙일보>를 창간 했으며 1983년에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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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한국비료공업]] [[이병철]] 회장은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및 각종 언론,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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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1966년 5월 24일 삼성이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났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부과하였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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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에서 물러났던 [[이병철]] 회장은 70년대 후반 경영에 복귀했고 [[중앙일보]]를 창간 했으며 1983년에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br/>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힌 이맹희씨가 1993년 발간한 《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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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병철]]의 아들 [[이맹희]]는 자신이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혔으며, 1993년 회고록을 발간하여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주장하였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 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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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 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출처="[http://www.vop.co.kr/A00000282441.html 이병철 100년, 다시 돌아본 '사카린 밀수사건']", 『민중의 소리』, 2010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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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0일 (목) 23:04 판

사카린 밀수사건(─密輸事件)
김재현, "한국비료(韓肥) 사카린 밀수사건", 『네이버 블로그 - 따뜻한 고향』online, 작성일: 2016년 08월 21일.
대표명칭 사카린 밀수사건
한자표기 ─密輸事件
시대 현대
날짜 1966년 9월
관련인물 이병철,박정희
관련단체 한국비료공업



정의

1966년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을 밀수하여 부당이득을 취하였다가 발각된 사건.

내용

발단

사카린 밀수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여당 국회의원의 언론제보였다.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건축자재로 위장한 밀수품을 팔아 거액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제보는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밀수'를 '5대 사회악'의 하나로 규정해놓고 있었으며, 당시 삼성과 경쟁 관계에 있던 언론들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일개 회사의 일탈이 아니라 정권과의 뒷거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전개

1966년 9월 22일 이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가 진행 중이던 국회 본회의에서 김두한 의원이 각료들에게 오물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한국비료공업 이병철 회장은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및 각종 언론,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결말

일선에서 물러났던 이병철 회장은 70년대 후반 경영에 복귀했고 중앙일보를 창간 했으며 1983년에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이병철의 아들 이맹희는 자신이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혔으며, 1993년 회고록을 발간하여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주장하였다.

Quote-left.png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 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병철 100년, 다시 돌아본 '사카린 밀수사건'", 『민중의 소리』, 2010년 2월 13일.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병철 한국비료공업 A는 B를 창립하였다 1964년
이병철 사카린 밀수사건 A는 B를 주도하였다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 국회 오물투척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1966년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