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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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0일 (월) 18:12 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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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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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이칭 |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
주소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47호 |
문화재 지정일 | 1962.12.20 |
찬자 | 김영(金穎) |
서자 |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
승려 | 체징 |
승탑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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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의 탑비.
탑비
전체 높이 3.46m, 비신 높이 2.64m, 너비 1.37m.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화강석,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1] 보조선사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보물 제157호)과 함께 조성되었다.[2]
비문
비문에는 염거의 제자인 지선선사 체징(體澄)이 선종 가지산문을 열고 이를 신라 헌안왕과 왕실이 후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서 최초로 남종선을 전래하였을 때에 신라 불교계에서 남종선을 배척하였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3]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薳)과 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 번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4]이라고 평한 바 있다.[5]
비문 보러가기
가상현실
갤러리
- Borimsa stele.jpg
보림사 경내 탑비 위치
- Bojoseonsa.JPG
- SteleforMasterBojo gwibu.jpg
귀부
- SteleforMasterBojo isu.jpg
이수
- SteleforMasterBojo side.jpg
옆에서 본 탑비
- Borimsa stele rub.jpg
탑비 탁본[6]
그래프
관련항목
node | relation | no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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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를 위한 비이다 | 체징(體澄)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 | 는 -의 승탑이다 | 체징(體澄)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에 위치한다 |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지었다 | 김영(金穎)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썼다 |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
각주
- ↑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 ↑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 주요 소장품 검색 상세정보에서 인용.
- ↑ "하나의 비에 두 사람의 글씨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었다"라는 뜻.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에서 인용.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번호: 덕수(德壽)-005770-000.